6월 7일 월요일

 

회개에 관한 글 (크리토퍼 고든) 나눕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초대교회 때의 라오디게아는 깨끗한 물이 부족해서 수로를 통해 주변 지역의 온천수를 끌어와야 하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물이 그 도시에 이를 때가 되면, 물은 자주 오염되고 미지근해져서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를 그처럼 악취 나는 미지근한 물에 빗대어 설명하셨다. 때때로 그런 물을 마시다가 역겨워서 토하게 되듯, 예수님도 쓸모없게 되어 버린 교회의 상태를 보시며 토하여 버리겠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지닌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은 그 교회가 스스로를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지적하셨다. 한마디로 자신이 영적으로 빈곤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계 3:17). 그러면서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겉으로 드러나는 번영만을 추구하며 복음은 뒷전으로 미루고 있었다. 그들의 사역은 교만과 자신감으로 채워져 있었지, 영혼을 살리는 말씀 증거를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의 메시지는 스스로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선포하며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이끄는 사역은 더 이상 급선무가 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교인들 자신의 계획이나 역량 또는 교회에 대해 저마다 품은 기대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그들의 사역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예수님께로 사람들을 이끌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의만 드러내는 사역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눅 5:32).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심각한 경종을 울리셨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여기서 문을 두드리는 이미지는 자신의 사명을 망각한 교회를 훈계하고 다스리고자 하시는 그분의 의지를 보여 준다. 즉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분의 음성 듣기를 거부한다면, 그분이 직접 교회를 심판하기 위해 문을 여시겠다는 경고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교회가 문을 열고 회개하라는 그분의 음성에 순종한다면, 그분이 교회에 거하시며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자신의 임재를 누리게 하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이처럼 요한계시록 3장 20절이 보여 주는 예수님은 결코 마음의 문을 열어 달라며 우리에게 애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구절을 각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겉으로만 내세우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엄중한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한다고 경고하는 차원에서 이 본문을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구절은 문맥상 교회를 향한 회개의 부르심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타락한 세상에 생명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메시지를 등한시하고 외형적인 번영만을 추구하며 자신만만해하는 교회에 회개를 요청하고 있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만일 그와 같은 회개의 요청을 거부한다면, 교회는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도 스스로의 능력을 확신하며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에 소홀하게 된다면, 더 이상 참된 교회로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주님이 토하여 버리시는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이는 1세기 라오디게아 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경고다. 우리가 교회를 키우려고 수행하는 모든 프로젝트와 노력들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전하기 위해 지속하는 수고인지, 아니면 우리 자신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기 위해 추구하는 열심인지 돌아볼 문제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들려오는 예수님의 노크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러한 고민을 하게 만든다. 결국 교회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길 잃은 영혼이 주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는 본연의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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