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 월요일

문화와 믿음에 관한 귀한 글 (저스틴 딜레헤이) 하나 소개합니다. 끝까지 정독하시면 귀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있다. 리고니어 미니스트리(Ligonier Ministry)가 최근 시행한 ‘신학 상황(State of Theology)’에 관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는 이들 중에서도 30퍼센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고, 46퍼센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으며, 22퍼센트는 성 정체성은 ‘개인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수세기 전에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해도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화는 특히나 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를 인정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강한 상대주의와 개인주의에 물들어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명확하게 정의된 신앙을 저항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기독교를 선호한다. 

이 모든 상황은 지금이야말로 예수님의 형제가 우리에게 전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유다서 3절을 묵상하기에 좋은 환경임을 의미한다. 나는 이 구절을 세 가지 각도에서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덕적·신학적 혼란의 시대에서 믿음을 위해 싸우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바로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1. 명확한 경계와 내용이 있는 믿음

이 ‘믿음’이라는 단어는 보통 우리가 삶과 죽음에 대한 유일한 소망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믿음’은 믿는 행위가 아니라 믿는 ‘무엇’을 가리킨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1세기에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사도들이 기대한 일련의 정리된 가르침이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유다는 AD 65년의 기독교인에게 ‘믿음’을 위해 싸우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유다가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가능한 명령이었다. 현대의 일부 회의론자와 달리 유다는 ‘여러 기독교’에 관해서 말하지 않는다. 바울처럼 그도 오직 ‘하나의 믿음’(엡 4:5)만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반하여 가르친 사람들은 단지 대체 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거짓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갈 1:6-9).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모든 것에 다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롬 14장), 그럼에도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동의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고전 15:3; 갈 1장).

유다의 명령은 또한 성경이 비록 엄청나게 방대한 책이지만, 그 안에는 정확하게 요약할 수 있는 가르침이 들어있음을 시사한다. 그것이 바로 건강한 신조나 고백이 의미하는 바이다. 교회 웹 사이트에 ‘우리가 믿는 것’이라는 섹션이 없는 교회를 나는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지 않는다. 무엇을 믿는지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음은 유다에게 빈 깡통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이 사실은 바로 다음 질문을 부른다. 믿음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인가? 

2. 도덕적 그리고 교리적 진리로 가득한 믿음

유다와 초대 교회에게 믿음은 근본적인 도덕적 진리와 교리적 진리를 모두 포함했다. 

도덕적 진리

첫째, 믿음에는 죄와 의에 대한 근본적인 도덕적 진리가 포함된다. 실제로 유다는 이렇게 경고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4절).

욕정에 빠져 살면서 그런 삶을 위한 신학적 합리화를 만드는 것은 믿음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기독교 사랑의 이름으로 무지개 깃발(역자 주 – 동성애 옹호를 의미)을 날리고 있는 일부 교회가 존재하는 오늘날 우리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런 교회를 향해 지금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을 경고하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7절).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우리의 사도적 믿음은 “죄 사함을 믿는다”(고전 6:9-11, 골 1:13-14).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면,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따라서 가장 중요해야만 한다. 

예수님은 계명을 완화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또한 이 세상의 도덕적 수준을 낮추기 위해서 죽으신 것도 아니다(마 5:19). 그는 우리가 죄의 속박에서 용서받고 해방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서 죽으셨다. 또한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다시 부활하셨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거짓 선생들이 부정한 믿음의 내용이다. 유다 시대뿐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말이다. 

내가 너무 일방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 말을 덧붙여야겠다. 우리는 성적 부도덕을 허용함으로써 믿음을 거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연로하신 부모를 돌보지 않음으로써도 믿음을 부인할 수 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우리에게 음행을 피하라고 가르치는 바로 그 믿음은 동시에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한다. 

(보통 성 혁명을 주장하는 이들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초기 신조에 포함된 교리적 진리에 대한 믿음을 축소하려는 시도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는 헛된 꿈이다. 

교리적 진리

어떻게 사는가는 관계없이 단순히 교리적 가르침만 인정하면 되는 것으로 기독교를 바라보는 한 부류가 있는 반면, 또 다른 부류는 기독교를 무엇을 믿는가와 관계없이 그냥 착한 사람으로 살도록 하는 종교로만 보고 있다. 이 말은 결국 삼위일체를 믿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무신론자와 힌두교인이 좋은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 전부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계명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리고 예수님에 따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 17:3).

기독교인은 단순히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인은 특정 사실을 믿는 사람이다. 믿음은 특정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확증한다. 우주 창조와 예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이다 (히 11:3; 고전 15장). 믿음은 또한 “예수가 주님이시다”, “여호와는 한 분이시다”, “세상 사람들이 믿는 다른 신은 무가치한 우상이다”(롬 10:9; 고전 12:3; 신 6:4; 고전 8:6; 시 96:5)와 같은 진술이 진리임을 증거한다. 또한 믿음은 악인의 심판과 육체의 부활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날 것임을 확증한다 (유다 6절, 14절; 고전 15장; 딤후 2:18).

행동이 없는 믿음(belief)은 죽은 것이지만, 믿음이 없는 행동도 치명적이다. 믿음은 단순히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단 한 순간도 좋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믿든지 상관없이 ‘선한’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수하고 단순한 도덕주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3. 믿음은 시대정신(Zeitgeist)을 이긴다

정통 기독교인들은 끊임없이 이런 말을 들어왔다. “현대인이라면 기독교의  ________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거기에 맞게 변하거나 아니면 사라져야 해.” 흥미로운 점은 다음과 같다. 트레빈 왁스(Trevin Wax)는 100년에 살았던 ‘현대인’이 믿지 못했던 것이 대개는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과 같은 교리적 진리였음을 지적한다. 1920년에 살았던 현대인은 성경 속 도덕성에는 문제가 없다고 보았지만 기적 이야기는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거의 그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우리 문화가 특히 기독교를 보면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성에 관한 성경의 도덕적 가르침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기독교는 진화하거나 사라져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듣고 있다. 그러나 20세기를 되돌아 보면 정반대의 현상을 볼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진화했던 교회는 다 죽었다. 목숨을 잃을 각오로 교리를 지킨 교회들은 지금도 살아남았다. 

유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믿음은 시대주의에 맞게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인간이 발명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문화는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서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믿음의 측면을 이리저리 바꾸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앞에는 언제나 걸림돌이 놓여 있다. 감각적인 욕망에 빠진 사람들은 단지 선행만 하면 얼마든지 자신을 용납하는, 그런 하나님을 원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 두 가지를 다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더 나은 것을 제시한다. 

우리는 실제로 신학적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자 하는 유혹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믿음 자체를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그들을 사랑하는 최고의 방법도 있다. 그것은 바로 유다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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