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 토요일

귀한 글 (팀 세비지) 나눕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나름의 사각지대를 가지고 있다. 운전자에게 사각지대는 그의 눈으로 볼 수 없어 사고를 일으키기 쉬운 곳이다. 크리스천들에게도 그들이 보지 못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사각지대가 있다. 그들은 그로 인해 하나님께 충분히 쓰임받지 못하며 삶의 기쁨도 적어진다. 목회를 하면서, 그 맹점을 보고 또 보았다. 나 자신 안에서도 그것을 보았다. 크리스천들이 과거의 죄가 용서받고 미래에 천국을 보증받은 것은 즐거워하면서, 현재 삶의 문제에 관해서는 그다지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바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매우 깊게 연결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간단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전치사구로 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자그마치 164번이나 크리스천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주 안에서’ 사는 사람들로 말한다. 이 표현은 아주 짧지만, 황홀한 크리스천의 삶을 매우 풍부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의 의미

우리가 ‘안에서’(in)라는 전치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좌우된다. 문법적으로 그것은 아마도 장소를 명시하고 있을 것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 위치해 있다.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의미를 온전히 끌어내기 위하여, 장소를 의미하는 전치사구 하나를 생각해 보자. ‘캘리포니아에서’(in California)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캘리포니아 주민으로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말할 수 있다. 캘리포니아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은 여행 잡지에 나와 있는 그대로 태양과 모래 및 파도타기의 삶을 경험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산다는 말은 황금 주(Golden State, 캘리포니아 주의 속칭-역주)의 기쁨에 흠뻑 빠진다는 뜻이다. 너무나도 그리하여 그런 기쁨이 당신의 삶의 일부가 된다는 의미이다. 캘리포니아가 당신의 피 속에 흐른다는 말이다. ‘캘리포니아에서’ 산다는 말은 당신의 내면에서 캘리포니아를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당신의 내면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는 의미이다.

전기를 가지고 비유하면 이를 훨씬 더 잘 묘사할 수 있다. 모든 전기 기사들은 플러그와 소켓으로 가득한 도구 박스를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그들은 플러그와 소켓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 플러그가 소켓에 꽂아지면, 플러그는 소켓에 아무것도 주지 않지만, 소켓은 플러그에 모든 것을 준다. 소켓은 순간적으로 플러그 속으로 급전류를 보내준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플러그이고 그리스도는 소켓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그에게 꽂아져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준다는 의미로 말이다. 회심의 순간에,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길 때, 그분은 자신의 본질적인 것, 즉, 그분의 사랑과 능력, 평화와 기쁨 그리고 의의 전류를, 진정으로 그 자신의 생명의 흐름을, 우리 안에 갑자기 밀어 넣어 주신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주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엡 3:19).

이것은 놀라운 확증이다. 분명히 하나님만 그분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 우리도 충만해질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은, 성경이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신성모독인 듯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말은 모든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모든 충만함으로 말이다.

그리스도가 거주하는 삶의 능력

이것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각지대와 같다. 우리는 충만함을 즐기기보다는 결핍감에 종종 무릎을 꿇는다. 때로 부적절하고 불안정함을 느낀다. 두려움과 죄책감 및 외로움으로 괴로워할 때도 많다. 내일 올 수도 있는 상실에 대해 미리 걱정하곤 한다. 평판이나 관계, 능력이나 소유물, 건강이나 행복을 상실할까봐 염려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짜증이 나며, 절망 속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함으로 가득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세상이 우리의 행로에 던지는 것들은 아무것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는 삶을 조금도 축소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기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의미 있는 모든 것을 상실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무한한 충만함이 있을 것이다.  

충만한 삶은 세상에게는 비밀이지만, 크리스천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주하는 성도들에게 이 비밀은 이제 나타났으며(골 1:26), 바울은 이 비밀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골 1:27)라는 아주 짧은 말로 함축하고 있다. 

성도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라는 말은 아마도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의 모든 서신들에서 강조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2장 20절과 4장 19절, 고린도후서 4장 6절, 로마서 8장 10절과 11절을 보라.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과거의 죄를 용서하시고 미래에 천국을 보증하셨을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우리 안에 풍성함을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이 현실을 생각해 보라고 촉구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만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진정으로 안다면, 우리는 그리 쉽게 낙심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그리 쉽게 의기소침해지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대해 그리 쉽게 불안해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원을 무한정으로 받으며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놀라운 진실은 바울의 가장 열정적인 기도 중의 하나로 등장한다.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후략]”(엡 3:14-17). 그 후에 바울은 훨씬 더 열렬하게 탄원을 한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힘을”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말이다(엡3:18–19).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깨달았다면, 이제 부족하다는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성령의 임재로 활기가 넘치게 되며,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받을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엡 3:20)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현실적으로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기독교의 일급비밀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6월 26일 토요일”에 대한 2개의 생각

  • 정말 귀한 글입니다. 옆에 두고 수시로 읽음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해 받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 세상일에 쉽게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나를 깨워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용기와 자신감을 주는 말씀 감사합니다.

도레미파솔에 답글 남기기 응답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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