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6일 화요일

 

기도에 관한 글 (스캇 허바드) 나눕니다. 

 

시간을 따로 정해서 기도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기도가 아닌 다른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최소 한 개 이상 머리에 떠오른다. 

어떤 이유들은 나름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좀 더 자야지” 또는 “할 일이 너무 많잖아.” 설득력은 좀 떨어지지만 다른 이유들도 많다. “그 경기를 누가 이겼을까?” 또는 “이메일부터 확인해야지.” 기도하려고 하면 이런 이유들이 치고 들어온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유들을 몽땅 묶어서 뭐라고 부를지, 그 이름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바로 거짓말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이 항상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잠을 생각해보자. 잠을 자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우리는 무릎 꿇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큼이나 베개를 베고 자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시 127:1-2).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이유들이 기도하려고 할 때면 어김없이 치고 들어와서 기도 시간을 망친다면, 그것들도 거짓말이 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죽이고, 지옥을 물리치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참으로 편리한 속임수가 될 수 있다.

이런 거짓말을 싸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그 진짜 민낯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거짓말을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네 가지 거짓말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예수님이 그런 거짓말을 얼마나 낱낱이 드러냈는지도 살펴보자.

‘기도할 시간이 없어’

우리의 기도를 막는 많은 거짓말 중에서도 특히 이 똑똑한 한 줄의 말은 종종 진짜같이 그럴듯해 보인다. “시간이 없어”라는 이 말은 단지 수학적인 시간 계산으로만 볼 때 극히 단순한 사실처럼 들린다. “24시간 밖에 없는 내 하루는 이미 꽉 찼어, 그러니까 기도는 내일 해도 돼”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병환자를 치료하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고 난리를 피우는 사람들 때문에(눅 5:1)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눅 5:15). 예수님의 사역은 성공적이었고 자연스럽게 많은 무리들이 몰려왔다. 단지 치료를 받으려는 것뿐 아니라, 그들은 “말씀을 들으려고도” 몰려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상황에서, 예수님도 기도를 건너 뛰고 이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기 위해 말씀을 좀 더 가르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데 그 다음 구절을 보자.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의 매일매일 스케줄은 결코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르는 다급한 일에 좌우되지 않았다. 어떤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보다 그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그런 거짓말에 결코 속지 않았다. 

기도에 전심을 쏟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수없이 찾아드는 차선의 선택지들을 향해서 “노”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순종하는 자세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족하는 마음은 아버지를 향한 의존으로, 피상적인 바쁨은 진정한 생산성으로, 그리고 긴급한 일이 만들어내는 마음속 혼란은 성령님의 지배하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기도는 노력하는 만큼의 효과가 없어’

이런 거짓말을 다른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소리내서 말할 만큼 용감한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기도가 효과가 없기 때문에 굳이 기도방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가? 우리 중 많은 이는 과거에 집중해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기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지 더 커진 혼란, 도리어 우리의 의지력은 약해지고 돌아오는 결과도 미약하기 짝이 없기에 더 이상 기도하고 싶은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거짓말에는 반쪽이지만 진실이 담겨 있다. 예수님이 경고하신대로, 기도는 끈질긴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눅 18:1) 한다고 가르쳤다. 사람이라면 기도를 하면서도 낙심하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과부처럼(눅 18:1-8), 기도하는 사람은 구하나 받지 못하고, 찾으나 찾지 못하고, 또 두드리나 안에서 부터 잠긴 문은 열리지 않을 것 같은(마 7:7) 그런 시간도 통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하는 모든 노력이 다 허사라는 거짓말을 깨어부순다. 진실되고 믿음에 찬 모든 간구는 응답을 받게 되어 있고, 모든 찾는 자는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모든 문은 더 이상 지체되지 않는다는 희망으로 채워진 채 언젠가는 열리게 되어 있다(마 7:8). 우리의 아버지는 기도 속에 갈등하는 우리 모두를 어떻게 해야 ‘좋은 것들’(마 7:11)로 채울지 잘 알고 있다. 가장 좋은 선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엿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을 하나로 모으는 시간, 육신의 정욕을 부인하는 시간, 그리고 머리를 숙이는 이 모든 기도의 시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기도가 그냥 허공을 때리는 것만 같은 날이면 C.S. 루이스의 다음 조언을 기억하도록 하자. “소위 말하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할 때 우리는 마치 물이 없는 땅에 수로를 파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침내 물이 터져나올 때, 우리는 물이 거기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시편사색). 기도하는 어떤 날에는 그냥 땅을 파고 또 파면서 비를 기다리고만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는 물을 마신다. 그러나 땅을 파지 않고는 물을 마실 수 없다.

‘기도 안 해도 오늘 하루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어’

조금 전 살펴본 거짓말처럼 이런 말을 소리내서 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지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수백 가지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깊은 단잠에서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먹고 뉴스까지 챙겨서 읽는데도 기도만 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결국 이렇게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아침식사, 깊은 여덟 시간의 숙면, 그리고 적절한 정보가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어, 그러나 기도 없이는 얼마든지 이 하루를 잘 살 수 있지.”

이 거짓말이 가진 위력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사실 기도하지 않고도 큰 사고 없이 하루를 잘 마무리한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기도하지 않은 날에도 놀라울 정도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곁눈질도 하지 않으면서 월급을 받고, 아이를 양육하고 또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실용주의적 삶의 양태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요 15:7),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기도하지 않고 노력해서 얻는 결과가 놀라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가 하나님의 눈에는 영적으로 빵점(spiritual zero)일 뿐이다. 우리는 단지 침몰하는 배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금방 지나가는”(요1 2:17)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목표라면, 기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루를 잘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천사들이 감탄해서 박수치게 하며, 또한 영원 세세토록 칭찬을 받는 것이라면, 기도는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아’

이것이 왜 거짓말인지를 드러내기 전에 우리는 먼저 회개하지 않은 죄는 하나님의 귀를 막아 우리의 기도가 들리지 않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아”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가슴 아프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타락한 세상에서 싸우고 있으며, 또한 안으로는 육신의 정욕 그리고 밖으로는 사탄에게 둘러싸여서 너무도 자주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시 65:2)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 특권의 가치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왜 기도하는 특권이 우리의 것인가? 왜냐하면 예수님이 새로운 언약의 세대에 맞춰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26).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 문을 두드린다면, 우리 이름을 근거로 기도를 들어달라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공로에 힘입어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을 근거로 기도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요 16:27; 17:3,6).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조금도 멀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목소리도 하나님에게서 결코 멀지 않다(요 16:28; 히 4:14-16).   

종종 하나님이 너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듣기에는 하나님이 너무나도 멀리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우리는 고요함 속에서 몇 달, 아니 몇 년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하는 자는 우리 귀에 하나님 아버지의 귀가 우리에게 완전히 닫혀있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우리는 미가 선지자처럼 말할 수 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라는 마술과 같은 말 앞에서 이 모든 거짓말은 사라진다. 정말로 하나님이 그의 귀를 우리의 소원을 향해 열고 있고, 또 그의 어깨를 우리의 짐을 향해 기울이고 있고 또한 그의 빛나는 얼굴이 우리의 찬양을 향해 있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장애도 우리를 그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다. 분주함, 어려움, 그리고 자만심은 우리에게 기도가 아닌 다른 것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내게 만족을 주며 내 짐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영광의 하나님, 당신은 내 기도를 들으십니다. 내가 그래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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