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6일 금요일

 

팀 켈러 목사님의 초대교회에 관한 글 나눕니다. 

 

초기 3세기 동안, 기독교인들은 다른 어떤 종교 집단들보다도 가장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다른 신들을 섬기고 황제를 숭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편협하며 사회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들로 비춰졌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일터나 영향권에서 불쾌하게 인식되거나 배제되어 때로는 죽음까지 처하게 된다면, 왜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이 되고자 했을까? 래리 허타도 (Larry Hurtado) 는 두 책 ‘이 땅의 어떤 이들은 왜 초기 3세기에 기독교인이 되려고 했을까?’(Why on Earth Did Anyone Become a Christian in the First three Centuries?)와 ‘처음으로 기독교인이라 불렸던 사람들’(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 라는 책에서 이 질문을 다루고 있다. 

허타도는 주된 이유로 기독교 교회는 독특한 “사회 프로젝트” 였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대조적인 공동체였고, 도발적이면서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끄는 반문화적인 집단이었다. 

하지만 무엇이 기독교 공동체를 그토록 다르게 만들었을까?

새로운 정체성

허타도는 이토록 특이한 사회 프로젝트의 저변에는 기독교인들의 독특한 종교적 정체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 이전에는 눈에 띄는 “종교적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민족 혹은 국가적 정체성이라는 측면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어떤 도시, 부족, 혹은 국가의 출신이라면, 당신은 그 도시와 부족과 국민들의 신들을 예배 했을 것이다. 즉 종교란 기본적으로 한 개인에게 할당되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최초로 인간의 사상에 자신의 인종이나 사회 지위를 막론하고 개인이 자신의 종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기독교는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한 개인의 새롭고 본질적인 정체성이 된다는 것을 급진적으로 주장하는 반면 동시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인종, 지위나 성별을 없앨 필요가 없음을 강조했다. 대신 그리스도와 맺은 관계가 자신을 두번째 위치로 강등시켰다. 로마 사회에 충격을 안겨다 주었던 이러한 주장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노예이건 자유인이건 혹은 높은 신분으로 태어났건 어떤 인종이나 국적으로 태어났건 관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갈 3:26–29). 이는 로마 사회의 견고한 사회 구조와 조직에 급격한 도전이 되었고 그것에서 최소한 다섯가지의 독특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1. 초대교회는 다민족 이었으며 놀랍게도 민족의 장벽을 넘어 연합을 경험했다 

안디옥 교회의 리더십에 대한 설명을 하나의 예로 볼 수 있다 (행 13).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서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놀랄만한 연합을 볼 수 있다. 에베소서 2장은 기독교인들 가운데 복음의 열매로서 민족적 화해의 중요성을 증언하고 있다. 

2. 초대교회는 용서와 화해의 공동체였다

이미 언급했듯이, 기독교인들은 배타적이었고 비판을 받았고 그들은 또한 핍박을 받고 옥살이를 했으며 매맞음과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인들은 용서와 대적들을 향해 복수를 그칠 것을 가르쳤다. 복수를 염두해 둔 수치심과 명예의 문화 속에서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대적들을 조롱하거나 비웃지 않았고 폭력으로 되 갚지도 않았다. 

3. 초대교회는 가난한 자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환대로 유명해졌다

한 가족이나 부족의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무차별적인” 도움은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미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눅 10:25–37)에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심지어 다른 민족들이나 종교에 있는 사람들까지 도와 주었고 이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게리 펀그렌(Gary Ferngren)의 에세이 ‘성육신과 초대 기독교인들의 자선활동’(The Incarnation and Early Christian Philanthropy)를 보라). 도시에 전염병이 생겼을 때, 기독교인들의 특징은 살던 도시를 떠나지 않았고 계속 남아서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며 공동체에서 병으로 아파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봐주었다.

4. 초대교회는 삶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공동체였다

이는 단순히 기독교인들은 낙태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낙태는 위험한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드문 일이었다. 더 보편적인 일들은 “유아 노출” (Infant exposure)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원치 않는 신생아들은 말그대로 쓰레기더미에 버려져서, 죽거나 혹은 노예나 매춘으로 상인들에게 팔려갔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유아들을 구해주고 데려갔다. 

5. 초대교회는 성적으로 반문화적이었다

로마 문화는 사회 지위를 지닌 결혼한 여성은 혼외 성관계를 삼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남성의 경우 (심지어 결혼한 남성도) 지위의 높낮이에서 낮은 계층에 있는 노예, 매춘부 그리고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과 성관계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지 허용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부분적으로 로마 문화의 성은 언제나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 되었기 때문이다. 성은 주로 참을 수 없는 육체적 정욕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기독교인들의 성적 기준은 달랐다. 교회는 이성간 결혼 외의 어떠한 성관계도 금지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성이 가지고 있는 “더 심오한 논리”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더 오래되고 겉으로 보기에 더 “자유로워 보이는” 이교도의 성적 관습들은 결국 더 엄격한 기독교 규범을 위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들은 성을 단순히 정욕으로만 보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자신을 전적으로 헌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희생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고 연합되는 방법으로써 바라보았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우하되 성과 사회적 지위의 이중 잣대를 거부하는 평등주의 자들이었다. 마침내 기독교는 성적 자기 통제를 인간 자유의 실현으로 바라 보았고, 이는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욕망이나 숙명 따위에 빠지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수치심에서 죄까지: 후기 고대 사회에서 성윤리의 기독교적 변화’ [From Shame to Sin: The Christian Transformation of Sexual Morality in Late Antiquity]를 보라).

사랑의 도전

초대 교회는 주변 문화와 어우러지지 않고 오히려 사랑으로 그들을 도전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결국 놀라운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만일 오늘날 이와 동일한 사회 프로젝트가 시행된다면, 그때와 비슷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