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31일 화요일

 

예배에 관한 귀한 글 ( 존 블룸) 나눕니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찾아 헤맨다. 모두 보물을 찾아 헤맨다. 가롯 유다와 마리아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소중히 여기는 그것을 얻기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식탁은 즐거운 대화로 소란스러웠다. 죽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사람들이 쏟아내는 질문들에 대해 나사로가 대답하고, 마르다가 빈 그릇들을 치우고 비어있는 포도주 잔을 채우는 사이, 마리아는 조용히 나와 다른 방으로 갔다. 

마리아는 작은 병이 들어 있는 큰 나무 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은 마리아는 그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고 머리 수건을 풀기 시작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향해 자세를 고쳐 앉으시자 사람들은 대화를 멈추고 숨을 죽였다. 마리아가 뭘 하는지 더 잘 보기 위해 사람들은 곧 목을 꼿꼿이 하고 앉거나 자리에 일어서기도 했다. 

그 작은 병을 꺼낸 후에 경건한 자세로 예수님의 발을 그 나무 그릇 안으로 모았다. 그리고는 병을 들고 마개를 연 후 안에 든 것을 천천히 예수님의 발 위에 부었다. 그리고 마리아가 오른손으로 자기의 머리털을 잡아 예수님의 발을 닦기 시작했을 때 방 안에 있던 이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귀하고도 놀라운 향이 식탁 너머로 퍼져나갔고, 손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얼마나 귀한 향유인지 모두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였다. 자신의 발을 닦는 마리아를 보시는 예수님의 눈에는 깊은 사랑이 가득했다. 

가롯 유다 역시 마음이 움직였지만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가 난 것이었다. 유다 자신은 가늠할 수도 없는 엄청난 돈을 마리아가 낭비한 것이었다. 그 향유는 한 사람이 일 년 동안 벌어야 하는 액수와 맞먹는 값이었다. 예수님과 지낸 지난 3년 중 제자들은 단 한 번도 그렇게 많은 액수의 돈을 한 번에 만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귀한 향유가 나무 그릇에 다 부어져 쓸모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유다의 분노에 찬 음성이 적막을 깼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유다의 이 물음으로 분위기가 갑자기 긴장되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닦기를 멈추고는 슬픈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예수님을 향했다. 유다처럼 마음이 불편했던 제자들은 여럿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보통 돈궤에서 남는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라 명하셨다. “남는” 돈이라 함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날 하루 동안 쓰고 남았다는 뜻이었다. 마리아의 행동은 어느 정도는 자기 멋대로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마리아를 바라보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셨다. 유다가 마리아에게 그리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요 12:6)가고자 함이었던 것도 알고 계셨다. 겉으로는 멋있게 들리는 유다의 항변은 사실 그 자신의 탐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거짓됨에 대해 그리고 그가 마리아의 경배를 어떻게 방해했는지에 대해 슬퍼하셨고 분노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라고 하셨고 꿰뚫어 보는 듯한 눈을 유다에게 돌리시며 깊은 슬픔이 묻은 음성으로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요 12:7–8).

소중히 여기는 것에 있어 마리아와 유다는 정반대다. 물론 둘 다 기쁨이라는 동기를 가졌다. 그저 감정이 결여된 의무감에서 행동했던 이는 없었다. 둘 다 자신들을 기쁘게 해줄 것이라 믿은 그 보화를 추구했던 것이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이 값진 진주였기에(마 13:45)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자신이 소유한 가장 비싼 것을 기꺼이 소비했다. 값진 진주 되신 예수님은 유다에게는 은전 삼십 개에 불과했다.  

기쁨을 추구했다는 것이 유다의 죄가 아니다. 그의 죄는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보다 돈을 소유하는 것이 그를 더 기쁘게 해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 유다여, 가치를 잘못 판단한 그대의 비극이여! 온 우주보다 더 값진 진주가 그대 앞에 앉아 있는데도 그대의 눈은 그릇 안에 담긴 향유만 향하는구나. 일 년치 급료를 낭비했다고 슬퍼하지만, 그대는 무한하고도 영원한 보화를 낭비했도다! 

마리아와 유다의 이야기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 우리가 무엇을 정말로 귀하게 여기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순간들로 우리를 데려가신다. 이러한 순간에 직면할 때 우리는 대가를 계산하게 된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이러한 순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에게 정말로 유익이 될 것이라 믿는 것을 선택하라 촉구한다. 그러한 순간은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 그 진주인지, 아니면 그릇에 담긴 향유인지 보여줄 것이다. 

진주를 택하고 나면,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를 유다의 말을 통해 들을 수 있다. 세상이 보기에 우리는 귀중한 시간, 지성, 물질, 젊음, 미래를 위한 재정적 보장, 그리고 직업 등을 예수님의 발 위에 쏟아붓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 귀한 것들이 교회, 선교지, 고아원, 자녀들을 키우느라 경력이 단절되는 가정에 부어져서 쓸모없게 되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눈에 이는 말도 안 되는 낭비다. 세상은 우리를 나무랄 것이다. 우리를 존경하리라 기대하지 말라.  

예수님은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것처럼 당신 역시 당신의 삶을 다 드리길 원하신다. 그것은 낭비가 아니고 참된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려놓는 삶, 세상적인 이익을 포기하는 삶은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가를 드러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우리를 경멸하는 이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유익이며, 이 세상의 향유를 얻고 그로 인해 자신의 영혼을 잃는 것이 진정한 낭비라는 사실을 선포한다(마 16:26).  

당신은 당신의 삶을 다 드리고 있는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