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 토요일

 

인간의 존엄에 관한 글 (제리 브리지스) 나눕니다. 

 

미국 가정에서는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구운 햄 또는 칠면조 요리와 같은 전통 음식을 저녁 식사 때 나눈다. 이따금 스테이크를 먹거나 주말이 되면 팟 로스트를 즐기기도 한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람들은 생선이나 조류, 또는 다양한 짐승을 잡아먹으며 살아왔다. 최근 동물권(the animal rights)에 대한 주장이 부상하기 전까지, 식용을 목적으로 동물을 죽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인간을 죽이는 일은 오래전부터 형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로 취급해 왔다. 왜 그렇게 취급해 왔을까? 왜 새나 동물을 죽이는 일과 사람을 죽이는 일은 서로 구분되었을까? 우리는 창세기 9장 1절-6절에서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사람과 구별하신다. 그리고 모든 동물을 사람에게 양식으로 주신다. 그 결과 사람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동물을 죽이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이 동물을 양식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물과 달리 사람에 대해서는 이런 말씀이 주어진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즉 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죽이는 일은 괜찮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 1:27).

여기까지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성경 구절을 간과한다. 그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본문이다. 바로 야고보서 3장 9절이다. “이것으로 [곧 우리의 혀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약 3:9). 다른 모든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인간에게 잔존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창세기 9장 6절과 야고보서 3장 9절이 타락 이후의 인류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타인에게 해서는 안 될 두 가지 금기 사항이 주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바로 살인과 저주이다). 특히 야고보서의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 본문이 타인에 대한 저주나 강도 높은 비난만이 아니라 상대에게 상처나 모욕을 주기 위해 내뱉는 차갑고 거친 말까지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누구도 타인을 살해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저주하거나 수치심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살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 너무나도 자주 거친 말을 입 밖에 내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그런 말을 한다.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때, 우리는 상대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는 셈이다.

이처럼 살인과 거친 언사를 금하는 두 가지 경고로부터 우리는 대인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성경의 더 큰 원리를 도출하게 된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인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마치 하나님 자신을 상대하는 일처럼 간주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잠언에는 이런 교훈이 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또한 예수님도 그와 같은 원리에 근거하여 마지막 날 우리의 행위가 평가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흔히 우리는 누군가가 정직하거나 도덕적으로 바른 생활을 할 때 그에 대해 진실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진실함이란 타인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삶에서는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동하지만, 타인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거칠고 교만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그 성별이나 인종 또는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할 대상임을 잊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진실성에도 큰 타격을 입힌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많이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타인에게 하는 말이나 타인에 관해서 하는 말은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기본 원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여기서 지적하는 더러운 말이란, 우리의 직접적인 대화 상대이든 혹은 우리가 대화의 소재로 삼고 있는 상대이든 그 상대를 비방하는 모든 말을 일컫는다. 일상의 다른 영역에서는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사람도 대인 관계에서는 그 같은 말을 금하는 데 안타깝게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경솔하게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일이 쉽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 상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인데도 말이다.

노숙자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겨울철 시내에 있는 도서관에 가면 바깥 추위를 피해 그곳으로 찾아 들어온 노숙자를 만날 수 있다. 그런 노숙자는 흔히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불편을 끼치기 쉽다. 면도도 안 하고 샤워도 하지 않은 상태로 지저분한 옷을 입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서관에 어울리는 단정하고 말쑥한 사람들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노숙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그런 사람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자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이상의 일을 실천할 수도 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곤경을 돌아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엄중히 질책하셨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이 질책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이 글에서 다 나눌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는 모든 성도가 가난한 자를 섬기는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장에 가서 도움의 손길을 주든 아니면 다른 수단을 통해 후원하든 그러한 사역에 꼭 참여해야 한다. 물론 아프리카에 있는 고아를 돕기 위해서는 관대하게 베풀면서도 정작 우리가 사는 지역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는 생명을 보호하는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태아를 보호하는 이슈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낙태를 허용하는 현행법으로 인해 태아의 생명을 지키려는 운동이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들이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을 돌보는 기관을 몸소 방문하거나 재정적으로 돕는 일이다. 또는 낙태를 쉽사리 허용하는 법률을 개정하기 위해 의회에서 또는 법정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할 수도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로 대 웨이드 대법원 판결’(the Roe v. Wade Supreme Court decision) 이래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쟁점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공론이 양분되는 현상을 보여 왔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이슈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리다 보면, 우리 역시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 신념을 잃어버리기 쉽다. 각각의 태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놓쳐 버릴 수 있는 것이다. 태아의 생명은 정당 간 대립이나 법정 싸움을 초월해서 지켜져야 할 가치이다. 우리는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서 기도로 싸워야 한다.

이러한 낙태와 더불어 노인이나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 안락사나 조력 자살을 허용하는 일도 위협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가족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요양병원에서 쇠약하게 지내는 노인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신력이 크게 손상되어 타인과의 관계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크든 간에, 그들 역시도 인간의 존엄성을 가졌기에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현재 세계에는 7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제 우리는 세계에 흩어진 사람들을 이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치명적인 지진 또는 태풍이 일어나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거처를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런 소식을 마치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 세상의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어야 할까? 아니면 이재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여기며 그 존엄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깊은 연민을 품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까?

우리 가운데 누구도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딴 섬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매일 타인과 교제한다. 어떠한 상황과 맥락에서 상대와 교제하든, 우리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명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갈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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