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일 주일

 

교회와 거룩에 관한 글 (메간 힐) 나눕니다. 

 

대학 다닐 때, 어린 시절의 습관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나는 예배와 휴식을 위해 일요일을 따로 떼어놓기로 결심했다(출 20:8-11). 그에 따라 나는 주일에는 논문 쓰기, 시험공부, 읽기 과제 완료하기, 실험실 보고서 초안 작성하기 등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건 결코 지키기 쉬운 결심이 아니었다. 내 친구들은 대부분 일요일에 밀린 숙제와 빨래 등을 처리했다. 내가 교회에 갈 때 그들은 도서관에 갔고, 내가 성경을 읽는 동안 그들은 모여서 월요일 시험 준비를 했다.

이런 나는 외로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학생들이 나와 같은 신념을 공유했고 우리는 주일을 함께 보냈다. 대학생 시절 일요일에 대한 나의 기억은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하다. 교회로 향하는 자동차에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 만들기, 예배 후 함께 식사하기, 또 기숙사 바닥에 나란히 누워서 설교를 듣거나 책에 대해 토론하기 등등. 늦은 시간까지 성경 공부를 하고는 우리는 함께 캠퍼스로 돌아갔다.

그랬다.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주일 하루를 온전히 예배에 바쳤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함께 했다. 우리들에게 거룩함은 개인적인 야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즐겁게 추구하는 공동체 프로젝트였다.

독불장군 성도는 없다

이것이야말로 거룩함에 대해 성경이 반복해서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예배, 사역, 기도, 또는 성적 순결 등 어떤 주제가 되었든지 간에 성경은 우리가 추구하는 거룩이 결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사실은 교회로서 연합하는 정체성의 기초가 된다.

성경이 “성도(saints)”(또는 “거룩한 자”)에 대해 말할 때는 특정 교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다. 사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개개인의 성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학자 필립 라이큰(Philip Ryken)이 설명했듯이, 신약 성경에 60번 등장한 이 단어는 항상 복수형이며 언제나 교회에 소속한 모든 기독교인을 지칭하기 위해 쓰인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롬 15:26),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엡 1:1),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성도들”(빌 1:1) 그리고 “아가야 전체에 있는 성도들”(고후 1:1)처럼 쓰였다.

우리는 홀로된 성도, 뚝 떨어진 언덕에 홀로 서서 후광을 반사하는 대리석 조각상이 아니다. 우리는 연합된 성도들이며 거룩한 모임의 일원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체 속에 속할 때 참으로 거룩한 존재가 된다.

시대를 지나면서 세계 각지에 흩어진 모든 교회의 장의자는 언제나 상이한 영적 성숙의 단계를 거치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하도 읽고 또 읽어서 이제는 다 낡아버린 성경책을 들고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소선지서가 어디 있는지 아직 찾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우리는 매주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예배한다. 우리는 평생 간절히 기도해 온 사람들뿐 아니라 이제 기도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과도 함께 기도한다. 우리는 모든 찬송가를 다 외우는 사람들뿐 아니라 처음으로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과도 함께 찬양한다.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들, 개척 멤버들, 그리고 영적 신생아들과도 함께 앉아서 설교를 듣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닌 근본적인 정체성은 우리 모두가 다 거룩하다는 사실이다. 성도들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고 그 성도들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

물론 우리가 항상 거룩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도 아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선뜻 이해하기 힘들 지도 모른다(고전 1:2). 바로 다음 장에 들어서면 그 교회가 분열, 성적인 죄, 우상 숭배, 거짓 가르침, 그리고 험담 및 무질서로 가득 찬 교회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분명히 신약성경에서 가장 미성숙한 교회였던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적지 않은 “걱정과 근심”를 일으켰다(고후 2:4).

그럼에도 바울은 그들을 “성도”라고 불렀다.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지역 교회도 결점과 약점에 시달릴지 모르지만 우리 교회는 결코 그런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지도 또 정의되지도 않는다. 사실상, 교회가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연합하여 거룩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도들이 연합에 도달하고 지식이 증가하며 성숙해지고 충만해지기를 원하신다(엡 4:13).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완벽하게 조화하는 몸이 될 것이다.

고맙게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 그는 승리의 중재자이며 그 분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가득하다(골 1:19).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 그는 자신을 당신의 몸이 된 교회와 하나로 만드셨으면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분 안에 거하는 모든 충만함으로 그는 그의 교회를 채우신다(엡 1:22-23).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그는 자신의 몸이 되는 교회를 거룩하게 하신다.

거룩은 공동체 프로젝트이다

이 진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격려한다. 한편으로 내 자신과 영적 성숙에 대해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경우,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모든 손톱, 귓불, 속눈썹까지 세세한 모든 부분의 거룩함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가 꿈꾸는 거룩함은 완성되지 않을 것임을 상기시켜준다.

거룩은 개인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사다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고독한 여행도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개인적인 탐구도 아니며 각자 자신의 목표를 결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 하라며 방치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거룩은 다른 성도들의 거룩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번째로 흔들리는 거룩함 때문에 쉽게 좌절하는 경우라면 이 구절은 우리가 완전한 거룩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이야말로 과거 가장 훌륭한 성도들이 이룬 거룩함만큼이나 확실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미 거룩하게 만드셨고 또한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모두를 다 거룩하게 만들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충만함으로 채우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가 언젠가 다 함께 완전한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엡 4:13).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거룩한 약속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의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를 한 명도 빠짐없이 거룩하게 만드실 것이다. 이 소망을 붙잡고 우리는 세상과 육신, 그리고 마귀와 대항하며 이 땅에서 교회의 사명을 추구할 수 있다. 이 희망을 붙잡고, 그리스도의 목표를 위해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을 지도 모를 위험까지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그리고 이 희망을 붙잡고, 우리는 모두가 완전해지는 그 날까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거룩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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