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5일 수요일

 

회개에 관한 귀한 글 (김형익 목사) 나눕니다. 

 

교우들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일은 목회의 타협할 수 없는 목표고 어떤 수고와 고생도 아깝지 않은 일이다(갈 4:19). 참된 목회자들은 다 이것을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변화를 입게 되며,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나는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를 따라 목회를 하고 있는지,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말해야 함에도 너무 적게 말한 것들은 없는지를 생각했는데,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회개를 너무나 적게 언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새해를 시작하면서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자고 교우들에게 말했는데 그것은 내 반성의 결과였다.

마틴 루터가 95개 신학 논제에서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라고 한 것이 그 첫번째 논제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회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인—그리고 때로는 아주 더디기도 한—과정을 통해서 그의 택한 자들 안에서 육체의 부패성들을 제거하시고, 그 죄책을 깨끗케 하시며, 그들을 성전(聖殿)으로 거룩히 구별하시며, 참된 순결에게 이끌리는 모든 성향을 회복시켜 가시므로, 하나님이 택한 자들은 평생토록 회개를 실천하며, 또한 이러한 싸움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결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3.3.9).”

루터나 칼빈은 회개가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도구로 주어졌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회개라는 기준으로 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성품과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현저한 변화를 꾸준히 볼 수 없다면, 그것은 회개의 부재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오늘날 대다수의 교회 강단에서 회개는 낯선 주제가 되어 버렸고, 많은 신자의 삶에서 회개는 주변부로 밀려나 버렸다. 깊은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도 적지만, 그들의 기도에서조차 회개는 그 고유의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여기에는 단순히 회개가 줄었다거나 드물다는 것을 넘어, 회개에 대한 오해의 문제도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자고 교우들에게 말하면서, 회개를 오해하지 않도록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를 먼저 말해야만 했다. 내가 언급한 회개의 강조점을 세 가지만 소개한다.

첫째로, 회개는 일생에 한 번 또는 특별한 때만 하는 게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다. 회개를, 그리스도인이 될 때 돌이키는 회심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주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막 1:15). 또 회심은 회개와 믿음을 포함하는 개념이고, 믿음 없는 회개나 회개 없는 믿음은 참된 회심일 수 없다. 처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 일평생 믿음으로 살아야 하듯, 처음 회개로 하나님께로 나아온 사람은 일평생 회개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려서 나는 부흥회나 기도원에 가서 혹은 수련회에서 회개를 주로 했다. 그래서 회개는 특별한 행사 때 하는 것이란 생각을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다. 물론 특별한 때 특별한 방식으로 하는 회개가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성과 싸우고 그 죄성을 죽이는 수단으로서의 회개는 특별한 행사 때나 특별한 순간에만 행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칼빈은 거듭해서 회개가 일평생 일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평생토록 회개 자체를 위하여 힘써야 하며, 우리 자신을 거기(회개)에 헌신해야 하며, 끝까지 그것(회개)을 추구해야 한다(3.3.19).”

둘째로, 회개는 즐거운 일이다. 나는 회심 이후에도 오래도록 회개를 소위 종교적 회개로 오해하고 살았는데, 사실 지금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회개에 대해 이런 오해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런 오해는 회개를 할 때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나를 벌하실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을 떨쳐버리겠다는 동기 그 이상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이런 회개는 언제나 부담스럽고 고통스럽다. 존 파이퍼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죄에 대한 뉘우침으로 시작되는 철저한 순종의 강력하고 고통스러운 행동은 하나님 안에 있는 즐거움을 깨닫고 맛보는 데서 유발되어야 하며, 이러한 행동에 불을 지피는 설교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지존하며 영원히 만족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을 진정으로 슬퍼하게 하려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는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적 회개는 하나님의 거룩의 매혹적인 모습에 기초합니다. 형제들이여, 양떼가 즐거움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하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즐거움을 통해 회개에 이르게 하라”고? 그 실례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에서 읽을 수 있다. “내가 공개적으로, 그러나 심하지는 않은 말로 울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무서운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충만하고 부족함이 없는 공로를 그들에게 제시하고 그분이 자신에게 오는 모든 자를 기꺼이 구원하신다고 말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에게 기쁨으로 나오라고 했을 뿐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강하게 선포된 몇 마디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영혼의 아픔을 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이것이 복음적 회개다. 이것은 두려움보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온전히 용서하시고 용납하셨다는 믿음에 이끌리는 회개다. 죄를 고백할 때 나를 쫓아내지 않을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이끄는 회개다. 이런 회개는 자신이 죄를 얼마나 뉘우치는지에 초점을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신 복음 안에서 확신을 누리게 한다. 그래서 회개는 즐거운 일이다.

셋째로, 앞에 살짝 언급된 내용이지만, 회개는 참 하나님을 뵈올 때 발생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질 때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이 일어난다고 말했다(고후 3:18; 4:4-6). 회개는 성령님께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 그 영광을 목도한 사람에게 발생하는 필연적 반응이다. 어떻게 거룩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뵈었는데 회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회개는 정말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고 했다. 이점에서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회개 부재의 신앙이 된 데는, 참된 설교의 부재, 설교의 타락이 한 몫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강단에서 말씀이 온전히 회복된다면, 성도가 일생에 걸쳐서 행하는 복음적 회개도 회복될 것이다. 

한국 교회의 강단을 오염시킨 번영신학과 율법주의의 가르침으로는 결코 참된 성경적 회개를 회복할 수 없다. 그리고 성경적 회개가 없는 신앙은 결국 기형적이고 괴물 같은 기독교인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회개를 회복할 때, 무너진 윤리도 회복될 것이고, 언젠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는 주님의 말씀을 한국 사회에서 다시 경험하게 될 날이 오리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회개하는 신자’로 살아가는 은혜의 날을 주님께서 꼭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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