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1일 화요일

 

두려움에 관한 글 (크리스틴 탭) 나눕니다. 

 

나는 백미러로 운전사를 쏘아보았다. 우리는 움푹 파인 동부 아프리카 도로를 따라 여행 중이었고, 자동차는 시속 70 마일이 넘는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나는 있지도 않은 안전 벨트를 마음속으로 부여잡은 채 안절부절했다. 결국 미친 듯이 달려오는 맞은편 차를 상대로 기사가 마음대로 경주를 시작했을 때, 나는 위험하게 운전하는 그를 향해 날카롭고 퉁명스러운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우리를 초대한 지인은 당황한 채 어색한 목소리를 냈고, 함께 타고 있던 몇몇 사람들은 지나치게 예민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미 그보다 큰 두려움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신뢰의 정도를 드러낸다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에 불안한 상황을 종종 보고 또 겪는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죄로 인해 타락하고 왜곡된 이 세상은 더 이상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 결과 두려움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었다.

두려움을 느끼는 감정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내 속에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주고, 우리 가정에 거주하게 하며, 관계와 양육을 통제하고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도록 놓아둔다면 이는 문제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두려움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세상을 보는 우리의 관점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두려움은 누가 지배권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올바른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우리는 종종 두려움이 찾아올 때 문제를 철저하게 파악하고, 확률을 분석하며, 해결 방안의 실행 가능성 등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는 한다. 혹은 아예 불안감의 원인이나 감정 그 자체를 회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을 통해 두려움을 단순히 잦아들게 하는 대신, 그와 대항하여 담대히 싸우는 방법은 없을까? 두려움에 움켜잡은 운전대를 내려놓고 “내 힘으로는 두려움을 다스릴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지배권을 가지고 계시므로 나는 괜찮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1. 두려움을 인식하라

두려움은 단단한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면 너머의 존재를 알아차려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집앞 놀이터에 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매번 선크림을 듬뿍 발라주고 챙이 넓은 모자와 긴 소매 셔츠를 반드시 입힌다고 가정하자. 이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단 1분이라도 햇빛에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것이 얼마나 나를 두렵게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발견이 그저 작은 발걸음을 떼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상은 결코 그렇지 않다. 두려움이라는 존재를 한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않거나 혹은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상태로 일생을 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인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문제가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단지 운전자의 불안한 상태를 그 차에 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즉 자신이 안전하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두려움을 대면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은 그 용기를 구하는 자에게 아낌없이 베푸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안의 두려움을 알고 시인해 보도록 하라.

2. 두려움을 명명하라

두려움의 존재를 깨닫게 되면, 자신을 진정으로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사실 우리는 선크림 없이 외출하는 그 행위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로 인해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부정적인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여기서 혹시 모를 무서운 결과란 아이들이 햇빛에 그대로 노출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피부암 혹은 선크림 속 발암물질로 인한 다른 질병의 발생 등이다.

때로는 두려움이 나를 포함한 공동체 전체를 흔들기도 한다. 한 엄마가 해변가에서 여러 친구들에게 선크림과 관련된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이 때 다른 엄마도 자신이 느끼는 비슷한 불안을 이야기하며 거들 것이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덜 신경 쓰던 엄마들은 본인이 너무 안일했던 것은 아닌지 자책하며 갑자기 근심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생겨난 두려움은 모임 안에서 점차 확대대고 재생산되어 더욱 큰 걱정을 야기할 것이다.

나는 지금 지혜를 나누지 말거나, 주의를 갖지 말거나, 혹은 잠재적 위험에서 서로 보호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때로는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 과도한 두려움을 일으켜 나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까지 불안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 만큼 아이들에 대한 청지기 역할을 지혜롭게 수행해야 한다.

3. 두려움을 물리치라

두려움이 나를 짓누르려 할 때, 예수님은 내가 두려워하는 그 무엇보다 더 강한 분이라고 믿고 선언하라. 그리고 그 선언을 통하여 두려움에 대항하라.

암은 무서운 질병이지만 성경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작은 부분까지 전부 돌보시며(눅 12:7), 질병을 포함한 당신 인생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에 이르게 하신다고(롬 8:28) 명백히 선언한다. 하나님은 내 아이들을 피부암으로부터 능히 보호하실 수 있으나(시 91:3), 그리하지 않기로 선택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러한 선택을 우리가 경험하는 동안, 그분은 변함없이 또 반드시 나와 함께 동행하실 것이다(히 13:5). 

예수님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라고 하셨다. 당신은 피부암을 두려워하면서 그것을 마주칠까봐 근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이미 정복하신 것에 자신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대신, 주님이 나를 부르신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후 10:5). 우리는 그 두려움을 물리칠 때까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계속 기억하고 선포해야 한다.

죽음은 인간을 두렵게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멸하셨다. 다시 말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여 두려움을 물리치시고, 또 다시 살아나는 역사를 통하여 죽음을 완전하게 이기신 승리자가 되셨다. 그분이 십자가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그러한 성취를 이루신 이유는 그분의 자녀들을 사망의 노예가 되는 것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물론 나와 당신은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 두려움의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대적 사탄과 그가 던진 두려움의 화살을 온전하게 이기신, 믿을 수 있는 승리자이다. 그분의 자녀인 우리는 오늘도 그 사실을 선언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승리자이신 하늘 아버지를 신뢰할 때, 그분은 심히 즐거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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