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주일

 

어느 사역자 (테사 톰슨) 귀한 간증을 통한 권면의 글 나눕니다. 

 

거의 스무 명의 대학생이 우리 집에서 편안하게 지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모든 게 제자리를 잡아간다고 느꼈다. 집은 깨끗했고 슬로우 쿠커에는 부드러운 바비큐 치킨이 가득했으며, 커피를 끓일 준비도 다 끝나 있었다. 남편이 청빙을 받아 최근 이사한 우리는 새로 부임한 교회에 충실하게 출석하는 인근 대학의 학생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 주일 오후, 정신없는 부엌을 지날 때, 내 침착함은 돌연 고통스럽게 상기되는 나의 나약함 때문에 깨지고 말았다. 내가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예의 바른 한 청년이 더러운 접시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간단한 질문을 했을 때, 나는 바로 옆에서 커피를 따르고 있던 여자 학생에게 지금 저 청년이 뭐라고 하는지를 물어야만 하는 어색한 상황을 만들고야 말았다. 그 여자 학생의 입술을 읽는 게 더 쉬웠기 때문이다. 

‘휴우~ 주님, 내가 귀머거리라는 사실을 결코 오래 잊고 있도록 그냥 놔두는 법이 없으시군요.’ 몇 분 후, 우리는 모두 거실로 모였다. 학생들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자막으로 나오는 그들의 말을 읽었다. 이런 첨단 기술에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특별하게 선택한 이 육체의 가시에 별로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이 신경계의 가시가 내 육체에 머문 지 거의 이십 년이 되어 간다. 나는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간청하지 않았다. 아마도 삼백 번 정도 기도했을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가시를 없애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나는 이 육체적인 약점이 이 세상에서 사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색한 대화, 제한된 사역 능력, 조용한 교회 예배는 아버지께서 나를 위해 선택하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분의 영광을 위해 연약해지는 것에 대해 배울 것이 많지만, 이런 저런 일을 통해 나는 적어도 한 가지를 제대로 배웠다. 그리스도인의 연약함이 가져다주는 것은 비참함 아니면 성숙이라는 사실이다. 달리 말하면, 연약함은 좌절을 낳거나 또는 열매를 맺는다.

사도 바울도 이 점에 기꺼이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무엇이었을까? 투옥, 구타, 난파, 잠 못 이루는 밤, 굶주림, 끊임없는 위험, 그리고 교회의 건강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등등, 단지 몇 가지만 들어도 이렇게 많을 정도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에게 육체의 가시까지 주어서 더욱 약하게 만들었다. 바울은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지만,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다. 

겉으로만 봐서는 참 비참한 삶이다. 그런데도 바울이 자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왜 만족하고 항상 기뻐할까? 바울은 삶 속에 그런 약점과 고난이 없었다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연약함과 고난이 그를 날마다 더 그리스도의 충분함을 바라보도록 강요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든 고통은 바울을 배경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그리스도가 중앙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 모든 고통은 하나님 왕국에 필요한 열매 맺는 삶을 위해 지혜와 힘과 은혜를 간절히 원하는 바울로 하여금 날마다 예수님의 발 앞에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바울의 연약함은 비참이 아니라 성숙에 이르는 도구였다. 바울은 성화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약함”에 대해 말할 때, 그건 죄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모든 기독교인 안에 내주하는 죄의 현실 때문에 죄는 참으로 언제나 우리의 궁극적인 약점이 된다. 즉, 이 땅에 사는 동안 죄를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가 주는 연약함도 우리가 그 죄를 죽일 때 성숙을 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사실 아직 영화롭게 되지 않은 몸으로 이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매일 많은 연약함을 경험하면서 산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바울이 말하는 것들은 우리를 나약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환경과 상황, 그리고 경험과 상처이다. 우리에게 충분한 힘이 있다면, 아마도 제거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주일 마다 모이는 지역 교회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의 이러한 약점들을 목격한다. 

어린 자녀를 둔 피곤한 어머니는 집 밖에서 사역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다. 나이든 성도는 몸과 마음이 점점 더 쇠퇴해감을 느끼고, 조금씩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대학생은 부족한 사회성 때문에 고통받는다. 이십 대 미혼인 어느 여성은 함께 일할 남편이 없는 사실에 어려움을 느끼며 결혼을 갈망하고 있다. 이런 식의 목록은 수도 없다. 만성 통증, 교육 부족, 재정적 압박, 끝없는 시련으로 인한 낙망, 사랑하는 사람을 돌보면서 느끼는 피로, 리더십 부족, 실업, 실명, 청각 장애 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상황 등등.

이러한 약점 때문에 좌절하며 우리는 그 연약함으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발휘해야 할 유용성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생각하기 쉽다. 돈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성격이 좀 달랐더라면, 조그만 더 건강했더라면,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날 좀 더 잘 이해시켰더라면, 이런 약함만 없었더라면, 등등. 

그러나 바울의 삶은 우리에게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피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포용한다. 약점은 그의 일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 매일 그의 거룩함을 돕는 조력자이다. 바울은 자신의 약점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통해 역사하고, 그의 유한한 수고를 결실 있게 만들고 있음을 상기한다. 거기에 더해서, 너무도 자주 표면 위로 올라오는 교만, 비통함, 탐욕, 게으름, 짜증과 같은 죄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에게 약점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 것인지도 잘 알고 있다. 

연약함 때문에 바울이 하나님을 위한 위대한 일을 하는 데 주저한 적이 없다. 약점은 결코 그를 수동적이거나 게으르게 만들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전 15:10). 그래서 바울은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그의 열매가 드러내는 건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다는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위대하신 하나님을 드러냈는가이다.

하나님을 위대하게 드러낸 것이 무엇인가? 연약함은 아니다. 연약함 그 자체는 결코 거룩한 것도 아니고 또 열매도 아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점에 대처했기에 실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좌절하며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대신, 또는 약점 때문에 침체되는 사역을 생각하며 절망하는 대신, 바울은 그의 눈을 육신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권능을 가지고 영광 중에 부활해서 아버지 우편에 앉으신 구주를 바라보았다. 바울이 이 구세주를 보았을 때, 자신은 단지 그 영광을 보고 찬양할 수 있는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님을 더 많이 바라볼수록 바울은 예수님을 닮아갔고, 그 결과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그의 연약함은 점점 더 큰 열매를 맺었다. 왜냐하면 나날이 성장하는 성숙함에 따라 그의 삶의 목표는 이제 “바울이 아니라 바울을 통한 그리스도가 드러나심이요, 바울의 영광을 위함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함이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연약함은 어렵다. 그 무게를 느낄 때 우리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며”(고후 5:2), 타락한 몸과 세상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하고 신음한다. 만약에 이런 신음이 우리로 하여금 오로지 내면만을 바라보게 하고 그 결과 우리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이 우리를 얼마나 불편하게 하는지 한탄하도록만 만든다면, 그렇다. 연약함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열매를 맺는 데 방해가 될 것이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죄와 비참함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탄식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성숙을 가져오는 탄식이다. 

연약함 가운데 나오는 나의 탄식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부러움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나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하신 일과 예수님을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보여 달라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이끄는 탄식일 수도 있다. 

연약함 가운데 나오는 나의 탄식이 교만에 기인한 불안함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내 마음이 안정을 찾는 곳은 사람의 칭찬이 아닌 그리스도의 미소이기에, 사람들을 더 잘 사랑하는 법을 배우도록 이끄는 탄식일 수도 있다. 

연약함 가운데 나오는 나의 탄식이 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느끼는 비통함을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그리스도와 연합했기에 그가 아낌없이 베푸시는 기쁨의 새로운 깊이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탄식일 수도 있다. 

연약함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이 당신의 연약함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능을 찬양할 수 있는 장성함에 이르도록 간절히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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