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 주일

 

기도에 관한 글 (데이빗 메티스) 나눕니다. 

 

시편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노래는 찬양이 아니다. 감사도 아니다. 그건 애통함이다.
이 사실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기도를 생각해보면 그건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대에 살면서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 죄를 짓는 것을 생각하면, 또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인(고후 7:5) 현실을 생각하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찬양과 감사만 할 수 있을까? 항상 그런 건 아니더라도 종종 우리는 애통한 심정으로 하나님에게 도와 달라고, 고쳐 달라고, 회복시켜 달라고, 또 환난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시편의 찬양시가 주는 영광은 명확하다. 우리의 환경과 관계없이, 또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면서도 찬양하는 게 맞는가 아닌가 하는 우리의 느낌과도 상관없이, 하나님은 언제나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나님, 우리의 구원자가 우리를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애통하는 시 속의 영광은 이것이다. 우리의 고통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의 환난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을 당해도 다른 곳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바로 그 행동 자체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애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장 큰 피난처임을 알게 된다.
우리의 영혼이 시들어갈 때
찬양과 감사의 시가 영광스러운 만큼, 또 시편 속에 애통하는 시가 많다는 사실은 지금 세대를 돌아보면 놀랄만한 것은 아니다.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ggemann)이 “방향을 읽어버린 시들”이라고 불렀던 애통하는 시가 시편 속에 많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방향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애통하는 시는 우리에게 더더욱 도움이 된다.
시편 6편을 예로 들어보자. 다윗이 만난 힘든 상황이(그 상황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관련한 것인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자신의 죄를 보게 했고, 또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절규하도록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 시를 회개에 초점을 맞추는 “참회의 시편” 여섯 편(32, 38, 51, 130 그리고 143편) 중의 첫 번째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죄로 인해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렇기에 시편 6편 속에서 드러나는 그의 고통과 혼란은 매우 심각하다. 이렇게 방향을 잃어버린 소용돌이 속에 빠진 다윗에게, 또 우리에게 하나님은 단지 이를 악물고, 미소 띤 얼굴로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며 고통을 이겨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말과 소년’(The Horse and His Boy)에서 아슬란이 샤스타에게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한다. “너 힘든 거 다 내게 말해봐.”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혼란을 아신다. 그 혼란을 단지 남들이 보지 못하게 옷장 밑으로 쓸어 넣어 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가 영감을 주어 기록한 시편 속 가장 흔한 형태의 시를 통해서 그 혼란을 인정한다. 우리에게 고통을 연습해서 익숙해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첫 일곱 구절에서 다윗은 절망 속에서 절규한다. 하나님을 향한 그런 간구는 애통하는 시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다윗은 마지막 세 구절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신감을 보이며 시의 어조를 바꾸어버린다(8-10절). 하나님 안에서 회복한 자신감에 넘치는 어조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도 애통하는 시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방향 상실의 수준을 뛰어넘길 원하신다. 사실상 하나님은 성경의 애통하는 시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영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즉 그분의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설계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시편 6편에서 고통과 혼란을 호소하던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회복한 자신감과 확신을 표현하는 장면은 정말로 놀라울 정도이다. 그는 자신이 수척하고 뼈가 떨린다고 했다(2절). 그리고는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요를 적신다고 했다(6절). 그랬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선언한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 (시 6:8-9)
이제 방향이 바뀌었다. 그는 선언한다. 자신의 모든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떨게 될 것이라고(10절). 그런데 어떻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었다는 것을, 또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것을 자신할 수 있었을까? 새롭게 드러나는 그의 이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건 처음 일곱 구절이 지나고 나서 하나님이 그의 귀에 새로운 계시를 속삭여서 받아낸 게 아니었다. 또 우리는 놀라운 반전을 보여주는 마지막 세 구절이 다윗이 처음 애통하는 기도를 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그러니까 기도하고 난 후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나서 추가한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10절은 두 번에 걸쳐서 구원이 여전히 미래에 일어날 것임을(ESV 성경은 “shall”로 표기되었다) 암시하고 있다. 그 구원이 이미 벌어진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의 강력한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도 다윗처럼 영혼이 낙담하고 지칠 때 다윗과 같은 자신감을 가지는 방법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어떻게 방향을 바꾸시는가
거기에 대한 대답은 시편 속에 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는 진리를 상기하는 것(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상징하는 이름 야훼, 즉 여호와를 반복해서 부르고 있다), 당신의 영광을 향한 하나님의 열심, 그리고 소용돌이치는 죄성 속에서도 드러나는 다윗의 정직함, 바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믿음과 자신감이라는 은혜가 다윗에게 주어졌다. 방향 상실의 중심에서도 영적 온전함(spiritual sanity)이 회복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이 누구이고, 또 그가 하신 약속을 붙잡았기에 가능했다.
애통함은 힘들고 괴로워하면서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게 아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뜻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통로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적인 온전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다. 우리는 먼저 영적 방향 상실에서 방향 재정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리고 외부 상황이 좋게 바뀔 그때까지, 하나님이 정한 그때까지 필요한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누가 감히 왕과 비교 하랴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다윗 왕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지.” 다윗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의 왕이었으니까 틀린 말도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러나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나는 주를 구주로 고백하는 이 세상 수십억 기독교인 중 한 명일 뿐인데.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듣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내가 다윗처럼 말할 수 있을까? “주님이 들으셨다. 그가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라고? 내가 다윗이 가진 자신감 비슷한 것이라도 가질 수 있을까?
당신도 다윗이 가졌던 그 자신감과 100% 동일한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윗보다 더 큰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다윗보다 더 위대한 그의 후손이다. 그리스도는 다윗이 실현하고 싶었던 모든 일의 완성이고,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 장차 그의 민족의 왕이 될 존재였다. 예수님이 위대한 것은 그가 다윗의 후손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다윗이 위대한 이유가 그의 후손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 주님으로 믿을 때 그 믿음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해서 영적으로 우리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우리의 죄만을 가져가신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능력도 다 우리 것이 되게 하셨다.
자신감에 대한 질문은 우리를 어떻게 다윗과 비교할까의 문제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어떻게 다윗을 감히 예수님과 비교할까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이 다윗의 애통함도 들으셨다면, 다윗의 호소를 듣고 그의 기도에 응답했다면, 어떻게 그가 독생자 아들이 외치는 애통함을 듣고 응답하지 않으시겠는가? 당연히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아니 그보다 더 확실하게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시편 6편 10절에서 말하듯이 “갑자기” 그것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 당신이 지쳐서 낙담하고 있다면, 당신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얼마나 오래입니까?”(3절)라고 물었다면, 하나님이 이미 당신의 기도를 들었고 당신의 기도를 응답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건 하나님이 당신의 환경을 당장 바꾸어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또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는 보통 그런 식으로 일하시지 않는다. 다윗의 확신과 희망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구원이 아니라 내적인 회복을 통해서 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가 부르는 애통의 기도를 듣고 그에게 필요한 영적인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의 때에 마침내 완전한 구원이 올 때까지 그가 견딜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초대는 그의 귀가 우리의 기도를 듣고 있다는 것이고, 또 그는 단지 찬양과 감사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그를 향해 울라고 초대하신다. 우리의 고통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오라고, 그리고 모든 슬픔을 다 털어놓으라고 하신다. 그는 들으시고 그분의 시간에 반드시 움직인다고, 그리고 그날까지 필요한 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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