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2일 금요일

 

교회에 관한 글 (트레빈 왁스) 나눕니다. 

 

나는 무척이나 조부모님을 다시 안아드리고 싶다. 나는 동생과 동그란 도넛들을 우적우적 먹고 난 후 함께 기타를 치며 보내는 토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나는 부모님과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나서 연못 주변을 거닐며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날 아이들은 시끄러운 사촌 모두와 재회하여 그 집은 왁자지껄한 기쁨으로 가득해 간다.

우리에게 과학 기술의 발전은 감사한 일이지만,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는 시간만큼 좋지는 않다. 나는 가족이 그립다. 나의 교회 사람들 또한 그립다. 줌(Zoom)을 통해 교회 내 모임을 만나거나 또는 예배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주일을 보내지만, 나는 성도들의 대면 모임을 몹시 기다린다.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가족이기 때문이다.

트레빈 형제

20대에 루마니아에서 목회 사역을 하면서 알게 된 문화적 차이 중 하나는 모두가 나를 “트레빈 형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형제”는 성도들이 교구 목사들에게 준 직함이었다. 그것은 애정과 존경의 용어였다. 루마니아 교회가 가진 문화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형제나 자매였다. 어린 10대들이 노래하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또는 권고할 때에 알린 형제 또는 리디아 자매 등으로 소개되곤 했다. 

모두가 형제 또는 자매였기 때문에 교회는 내가 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보다 더 가족처럼 느껴졌다. 영적 성장을 향한 사도 바울의 비전을 다룬 스코트 맥나이트(Scot Mcknight)의 최근 저서(바울 목사: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는 것)에서 ‘형제자매로 지칭되는 문화’로서의 교회에 관해 한 챕터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목사들이 성도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더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

“말이 중요하다. 이미지는 모양을 만든다. 비유는 살아 있다. 어떤 설교자 유형들은 그들의 교회를 청중들로 생각하고, 어떤 상담자 유형들은 자신들의 회중들을 영혼들로 생각하며, 어떤 교사 유형들은 그들을 학생들로 생각한다; 제사장 유형들은 자신들의 회중들을 중재가 필요한 죄인들로 또는 가난한 사람들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의 교회들을 형제자매들이라 불렀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을 형제자매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청중, 영혼들, 학생들 또는 중재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문화가 아닌 형제애라는 문화를 만들었다.”(62)

친구 이상

스코트는 가족 문화로서의 교회가 두드러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교회는 5가지로 특징 지어진다.

1. 사랑으로

2. 모든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으로

3.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동반 성장으로

4. 경계의 안전과 보장을 인정함으로

5. 형제자매 관계는 우리의 형제이신 예수와 함께 시작되었음을 앎으로써

마지막 요점은 나머지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스코트는 기록한다.

바울에게 우리는 친구 이상이다. 우정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우정은 형제애로 변한다. 우리는 우리의 맏형 때문에 형제자매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형제자매들이 되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때문에 형제들로 관계를 맺었다(78). 

형제자매라는 용어로 교회를 묘사한 바울의 서술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자매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코트는 루마니아 작가 에밀 시오란(Emil Cioran)의 말을 인용한다: “사랑은 서로를 더 낫게 여기는 두 사람의 합의이다.” 즉 교회 가족 구성원이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는 바울의 훈계와 같다(롬 12:10).  

형제자매라 칭하는 문화에 대한 도전

소비주의 사회에서 교회로서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 중의 하나는 민족성, 계급, 문화, 정치 또는 예배 스타일로 구별된,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교회 모임을 찾기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비주의적 충동에 저항해야 한다. 가족으로서 교회의 형성적 영향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사람들, 즉 다양한 차이점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로 던져질 때 가장 큰 효과가 있다. 여러분의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선택하셨듯이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형제자매의 문화는 교회가 단지 예배에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연합이라는 개념에 반대한다. 어떤 신자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그리고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는 본질적으로 견고하지 못하다(porous understanding of the church)는 이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코트는 교회가 가족처럼 “사랑의 경계가 있는 공동체”라고 인식한다.

기독교 공동체의 형제자매를 표시하는 것은 세례, 그리스도 아래 있는 믿음의 삶, 그리고 그 물에서 흘러나오는 정체성이다. … 그 경계가 있는 공동체는 고대 가족들처럼 신앙의 공동체로서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그 명예를 지키는 형제자매 공동체와 같다는 것을 알도록 배워야 한다(70). 

가족 싸움이 있는 교회

나는 교회를 가족으로 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보는 교회, 사람들 서로가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확고한 것이라 보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가족처럼 사랑할지 모르지만 반대로 가족처럼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의 모험거리이다, 그렇지 않은가?  

G. K. 체스터턴(Chesterton)은 가족이 “항상 화목한 것은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작가들을 문제 삼았다. 그리나 가족의 불협화음이 가족을 좋은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차이점과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그 이유 때문에 건전하다. … 그것은 우리의 형제 조지가 우리의 종교적 어려움에 관심이 없지만 트로카데로(Trocadero) 레스토랑에 관심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삼촌 헨리는 우리의 자매 사라의 과장된 야망, 즉 가족은 인류와 같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좋은 이유나 나쁜 이유로 가족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좋은 이유든지 나쁜 이유든지 솔직히 인류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이모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합리하다. 아빠는 일반 사람들처럼 흥분을 잘한다. 우리 막내는 일반 사람들처럼 장난꾸러기이다. 할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처럼 어리석고 늙었다. 

또한 체스터턴(Chesterton)의 교훈은 교회에 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이런 저런 쟁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 사람 또는 저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토론하는 것 같다. 교회 가족을 같은 친구 그룹으로 바꾸는 것이나 또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 사상가들이나 팟캐스트에 기초하여 당신의 영적 성장을 재단하는 것은 유혹적인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살아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이슈들과 문제들과 논쟁들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교회가 진짜 죄인들, 아니면 성인들로만 가득 차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의 위대한 구원에 대해서 감사 외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종종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이번 격리 기간에 우리는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이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형제자매 문화를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고립의 시기에서 벗어나게 될 때 우리가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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