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4일 주일

 

찬양에 관한 글 (엔드류 윌슨) 나눕니다. 

 

찬양은 몸과 영을 하나로 연합한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 71:23).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선율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찬양은 우리 몸도 움직이게 한다. 혀, 목, 가슴, 횡경막, 폐의 호흡 그리고 흉부의 떨림까지 영혼의 기쁨에 합해져서 찬양은 더욱 은혜롭게 된다. 온 몸으로 찬양하면 우리의 감정은 고조되고 우리의 기쁨은 한층 더 커진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할 때 엔돌핀과 옥시토신의 분비가 늘도록 창조하셨다. 우리 몸과 영혼은 찬양할 때에 하나가 된다.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찬송하리)”(시 84:2).

찬양으로 하나 되는 네 가지 유형을 보자. 

1. 찬양은 다른 성도들과 하나 되게 한다

제니 폴락(Jennie Pollock)이 지난 달 이런 내용을 언급했다. 즉, 노래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게 해준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든 축구 경기장에서든 상관없고 술을 함께 마시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 했다. 

심리학자들은 노래가 갖는 하이브 스위치 기능 즉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일시적으로 이타적이며 공동체적인 상태로 몰입하게 하는 기능에 대해 몇 시간이라도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악에는 응당 그런 기능이 있다. 만약 많은 사람이 일시에 말을 한다면 각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함께 노래를 한다면 더더욱 하모니를 맞춘다면 개별 라인의 의미는 선명해질 것이고 다른 파트와 조화를 이루며 강하게 표현될 것이다. 그게 바로 교회가 보여줘야 할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시편을 함께 노래하며 산 자와 잠자는 자가 서로 하나됨을 느낀다면 더욱 영광스러울 것이다. 

2. 찬양은 인간과 살아있는 피조물을 하나로 이어준다

아침에 눈을 떴을 순간에 차소리나 애들 소리가 없다면 새들의 새벽 합창이 들렸을 것이다. 피조 만물은 노래를 한다. 항상 그래왔다. 진짜 음악처럼 노래하는 새들도 있고, 바다 속 깊은 곳에서 혹등고래는 멜로디를 만들기도 한다. 생쥐는 찍찍거리는 초음파 소리로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날개를 비벼서 음조가 아름다운 음악소리를 낸다. 한번은 조용한 이른 아침에 사자가 점잖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있는데, 기묘하게도 음악처럼 들렸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 같은 존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창세 이래 매일같이 찬양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아름다운 찬양은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왕되시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여, 목소리 높여서 우리 함께 노래하자.” 그런데 그 밖에도 노래하는 방법들은 허다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벌써부터 노래하고 있다. 우리는 그 대열에 초청받은 것이다. 

3. 찬양은 생물과 무생물을 이어준다

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과 연결되고 싶다는 소망이나 실제로 연결된 경험들을 얘기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세상과의 조화와 만물의 하나됨을 느낀다. 외딴 곳을 여행하거나 혹은 환각초를 피웠을 때 이런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우주 만물과 연결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래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사 55:12),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시 98:7~8)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하늘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 지어다”(시 148:2). 이런 구절들이 조금이라도 과장되게 들린다면 이 성경 구절을 깊이 새겨보라. 예수께서 환호하는 제자들을 꾸짖어 달라는 바리새파들의 항의를 받고 하신 말씀이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눅 19:40). 

4. 찬양은 피조물과 하나님을 하나되게 한다

천지창조의 노래는 음악의 고안자이며 운율의 근본인 위대한 가창자에게서 시작하고 끝난다. 그의 언어는 세상만물을 지탱시켜주고 그가 지은 박자는 오고 가는 계절의 리듬이 된다. 나는 방금 ‘마술사의 조카’(나니아 연대기 여섯 번째 작품)를 아들에게 읽어 주고 있었는데, 아슬란이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하는 대목이 다시금 경이로웠다. 그런데 하나님의 노래 가운데서는 가장 큰 환희는 창조가 아니라 구속사역에 담겨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르시는 특별송이 있는데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함께 찬양할 때 단지 우리끼리 서로 맞추거나 전체가 하나의 만들어진 질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분은 자녀들을 위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며,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찬미의 노래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그 분이시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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