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5일 월요일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글 (그리핀 걸리지) 나눕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 4:7).

크리스천들은 대부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순간이 있다.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마치 미래가 산산조각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급히 친구에게 나의 고통에 대해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나는 결국 실망하고 눈물 흘리며 깊은 침묵에 빠지고 말았다. 하나님께 외쳐야 했지만, 그분이 내 기도를 들으실지 혹은 나를 돌보실지 의문이 들었다. 그 순간에는 ‘내가 그분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기도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누가 내 기도를 들을까?’라는 생각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하나님, 주님,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 구세주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름이 있다. 이 이름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준다. 우리는 때로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강조하기 위하여 특정한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우리는 때로 성부 하나님께 기도할 때처럼, 삼위 하나님 중에서 구체적으로 한 인격을 부른다. 어떤 때는 ‘주님’이라는 명칭으로 하나님을 부른다.

눈물로 절실하게 기도하던 그날 밤에 나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이 내게 낯선 명칭은 아니었다. 수억 명의 크리스천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명칭으로 하나님을 불렀다. 그것은 내가 대학에서 청교도를 공부할 때 알게 된 이름이며,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내가 다시 정립할 때 알게 된 이름이다.  

그 이름은 ‘섭리자’이다.

섭리자는 누구인가?

초대 교회의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우주를 만드신 자가 모든 만물을 섭리하시며, 세계의 모든 일을 마련하신다”라고 말했다. 섭리는 모든 만물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하지만 그것은 좀 더 구체적이다. 따라서 존 칼빈(John Calvin)은 “하나님은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 마지막 남은 참새까지도 지탱하고 양육하며 돌보신다. [중략] 어떤 것도 우연히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했다(기독교강요 1권 16장 1절). 하나님은 돌보고 양육하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 안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최선의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계신다.

나는 대학과 신학교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를 놓고 수많은 논쟁과 다툼을 했던 일을 기억한다. 지나치게 열성적인 젊은 설교자들이 교리를 마치 흉칙한 무기처럼 사용한 험악한 이야기들도 기억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내가 편히 누울 수 있는 베개로 보게 한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교리였다. 나는 하나님이 세상의 주권자로서 내 삶의 모든 사항을 다스리신다는 교리를 수없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하나님 섭리의 메시지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에 눈뜨게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주권을 다스린다. 그분의 주권은 사람을 고려하지 않거나 긍휼히 여기지 않는, 냉정하고 가혹한 법률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리에서 우리는 그것을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섭리자가 당신을 돌보시는 자라면, 당신은 상실이나 고통이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마태복음 6장 25-34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마 6:25)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창조물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있다고 하신다. 새들은 씨를 뿌리지 않지만, 하나님이 먹이신다(마 6:26). 들의 백합화는 길쌈을 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솔로몬의 옷보다 더 훌륭하게 입히신다(마 6:28-29). 그리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듯이,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귀하다. 하나님은 그냥 우리의 창조주가 아니다. 그분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결론이 결정적이다.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2-33)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것들이 모두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독단적이지 않다. 그분은 자기 자녀들이 고통을 견디는지 시험하려고 축복을 내리지 않고 기다리는 분이 아니다. 섭리자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더하여 주신다.

고뇌와 슬픔으로 가득했던 그날 밤에, 내가 기도한 하나님이 내가 필요한 것을 아시며, 내게 공급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다.  

기도와 섭리

내가 기도하는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알고 내게 공급하는 분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기도 생활은 매달리거나 거래하거나 자랑하는 식이 아니라, 섭리의 하나님에게 우리를 온전히 의지하는 식으로 바뀔 것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오직 공급하거나 보호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크신 사랑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대도 (우리가 보통 잊기 쉬운) 사실이다. 우리의 기도를 주님이 들어주지 않으신다면, 그분이 우리를 그것으로부터 보호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에게 좋은 선물만 주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주기를 보류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그분의 궁극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원하는 대상 그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보류하신다. 다른 때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썩은 열매를 맺거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일으키거나 혹은 그것이 성장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시기를 보류하신다. 우리가 기도한 것을 즉각적으로 주시면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서 하나님은 때로 오래 응답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게 하신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정의를 구하는 여성처럼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며 계속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아니다. 그러한 순간에 그분은 우리가 굽신거릴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의 때에 우리가 응답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우리를 형성하고 순응시키신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졌든지 이루어지지 않았든지,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이는 섭리자이심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서 죽으심, 부활하심을 보여 주셨다.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하나님을 “크리스천이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없을 때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고 말했다. 영혼의 어두운 밤이 찾아오면, 폭풍우 후에 강물이 넘쳐흐르듯이 눈물이 나올 때,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허공을 울리는 것 같을 때,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실 뿐 아니라 공급하고, 양육하며, 모든 것들을 새롭게 하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쉼을 얻을 수 있다. 

섭리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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