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화요일

 

교회 역사 이야기 (짐 데이비스) 나눕니다.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공개한 지 504주년이 되는 날이다. 루터가 종교 개혁의 기초를 놓을 수 있도록 그가 발견한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그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에 서방 세계를 향해 로마 가톨릭의 숨막히는 권위를 깨뜨리고, 성경을 보통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유럽 전역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높이고, 또 수천 개의 새로운 기독교 교파를 탄생시키는 과정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

루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았다. 로마 가톨릭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을 달랠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결국 그 두려움을 더 증가시킬 뿐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교황 제도 아래서는 죄책감이 우리를 떠날 때까지 수고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고를 다하여도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터 자신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이 전혀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우울증에 빠져들 때마다 “복음이 왜 좋은 소식인가?”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그가 종교 개혁의 발판을 놓게 하는 발견으로 이어졌다.

조나단 리네보(Jonathan Linebaugh)는 곧 출간될 그의 책 ‘십자가의 말씀’(The Word of the Cross)에서 루터의 대답을 세 부분으로 설명한다.

1. 하나님의 약속

루터가 후기 중세 로마 가톨릭 전통을 이해한 것처럼, 사제가 “당신을 사죄합니다”(te absolvo)라고 할 때 그 말은 이미 받은 용서의 상태를 확증하는 것뿐이다. 회개한 죄인은 용서받았고 사제의 선언은 그 현실을 확증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 사실이 너무 궁금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내 죄를 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루터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하실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 존재를 의롭다고 하시지 않을까? 우리의 행위로 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의를 약속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인간 존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하신다.

의가 우리의 행위와는 별개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이 새로운 이해(또는 오히려 옛 이해의 재발견)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루터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는 것이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당신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 율법과 복음

루터는 율법과 복음이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이며, 다만 구속 역사에서 다른 부분을 담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받아들여졌지만 교회는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율법과 복음이 별개의 것임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율법의 기능을 새롭게 이해하고 이중적인 기능으로 설명했다. 그의 이해에 의하면, 첫째, 율법은 우리 죄의 결과를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루터는 타락한 인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자기의’라는 괴물, 목이 뻣뻣한 짐승은 큰 도끼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큰 도끼입니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루터는 “율법이 당신을 절망에 빠뜨릴 때, 법이 당신을 조금 더 나아가게 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팔 안으로 곧장 들어가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위업을 성취하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짊어지신 것이다.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복음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 그러면 이 자유의 약속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3. 믿음으로 의롭게 됨

이것은 루터의 획기적인 세 가지 발견 중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이다. 수년 동안 그는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배웠다. 즉 하나님이 불의한 사람들을 벌하시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당시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불가타 라틴어 성경은 의롭게 됨이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서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해하게 했다. 이것은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게 막는 결과를 낳았다. 대신, 그것은 고행과 연옥과 같은 교리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러나 원어인 헬라어에서 “의”(righteousness)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게 된 루터는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칭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우리에게 즉시 전가시켜 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복음의 약속을 믿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 장자의 명분으로 이 두 가지 특권[왕권과 사제직]을 얻으신 것과 같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것을 나누어 주십니다”라고 했다. 루터는 이것을 “행복한 교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주신 대신 그 대가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람들이 의로운 것과 불의한 두 가지 다른 상태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 두 가지 상태가 서로 겹쳐진다고 보았고, 그 겹치는 공간에서 크리스천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으로(simil iustus et peccator)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과: 좋은 소식

루터는 이러한 발견을 스스로 이렇게 묘사했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순전한 자비를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태어나 낙원의 열린 문을 통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루터가 발견한 것은 복음이 참으로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유를 경험했다. 충분히 알려지고 완전히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의 그런 자유를 말이다. 그것은 보장과 확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져다주는 자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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