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수요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글 (스카티 스미스) 나눕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아 7:10).

솔로몬 왕의 삶은 한 마디로 지혜로운 사람이 얼마나 동시에 가장 어리석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가서 속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 애정으로 차고 넘쳤던지, 결국 그 사랑은 700명의 부인과 300명의 첩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솔로몬 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이에 의해서 쓰인 이 아가서의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살펴보고 음미하도록 한다. 인류 전체를 향한 일반적인 사랑 뿐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특별한 사랑을 말이다. 

결코 사유화(privatized) 되어서는 안 되는 복음이지만, 복음은 반드시 개인화(personalized) 되어야 한다. 복음이 복음 되는 데에 있어서 우리 개인은 그 누구도 중요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는 이 복음 안에서 다 예외 없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쓰여질 당시의 환경과 상황에 맞는 뜻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말씀이 예수님 안에서 해석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구절도 결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그건 아가서도 다르지 않다.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의 것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 신학의 신비이자 복음이 가진 풍성함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정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내 사랑하는 자”라는 구절에 적합한 인물은 오로지 한 사람, 예수님 뿐이다. 그는 우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아들이고(마 3:17) 또한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단 하나의 인물(눅 24:44)이며 또한 성령님이 끊임없이 영광을 드러내는 분이다(요 16:14).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모든 것의 창조주, 운행자, 그리고 구원자로 바라보는 것은 그를 유다의 사자,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등불로 보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경건한 경외심에 빠져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영원한 영광과 그분의 피할 수 없는 위엄을 선포하는 천사의 군대,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 우리도 합류하는 것이다(계 4-5).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하나님 영광의 광채이다(히 1:3). 성령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은 이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주는 온전히 친교를 누리셨다(요 17:5).

그럼에도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라고 외치는 건 훨씬 더 장엄하다. ‘나는(I)’라고 할 때, 그 주어가 단지 이런 구절이 훨씬 더 잘 어울릴 거 같은 영적 거인만을 칭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속하였도다(am)’이라고 할 때, 그건 미래가 아닌 지금을 말하고 있다. 지금 현재의 상태로 나는 충분하고 또 지금도 거룩하지만, 미래 어느 시점에 영광스럽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에게 내가 미래에 속한 만큼이나 나는 지금도 동일하게 예수님께 속한 상태이다. ‘내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 속한 모든 교인을 의미하는 ‘우리가 사랑하는 자’의 의미가 아니다. 이건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로운 이야기인데,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사랑하는 분이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 2:20). 이 사실이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 사실은 나를 그에게 속한 자로 만든다. 할렐루야!

우리의 더 위대한 호세아

잠시만 멈춰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이 당신 마음 속에서 어떤 감정을 일으키는가? 복음이라는 게 단지 수호해야 하는 신학적 사실에 불과한가? 아니면, 당신 속에서 가장 큰 기쁨을 불러 일으키는 한 사람(a Person)이 바로 예수님인가? 당신이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혹시나 하나님이 은혜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은 아닌가? 믿음 없음 때문에 깊은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예 2:2; cf. 계 2:4). 예수님이 바로 이런 분임을 알고 있는가? 멈추지 않는 그의 사랑 안에서 기뻐하라.

팀 켈러 부부가 ‘결혼의 의미(The Meaning of Marriage)’에서 썼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언제나 바라는 바로 그 배우자이다. 예수님이 아닌 대상과 맺는 모든 형태의 로맨스와 친밀감을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이 우리와 맺는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열매로 바라볼 때에만 우리는 그런 감정을 올바르게 누리고 또 제대로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과 하는 결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결혼은 일시적이다. 물론 사람과 하는 결혼도 매우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만 임시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the Beloved one)가 결코 소진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애정을 우리에게 쏟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사물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싶어하는 고메스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신랑이다. 십자가 위에서 그는 결코 사랑받지 않았지만, 그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우리는 결코 바울이 말한 이런 담대한 선언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결코 이런 선언에 익숙해질 수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지식을 뛰어넘는 사랑

아마도 이 구절보다 더 웅장한 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여기에 있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한 문장이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마지막 호흡을 하는 순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건 정말로 영광스런 소망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용서했고 또 그분이 우리의 완전한 의로움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황홀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사랑스럽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를 사모하고 우리 속에서 그 분이 기쁨을 누린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이다. 

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세상 어떤 것이 가히 은혜 안에 서서 누리는 이 영광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복음이 당신에게 진리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건 그 복음이 당신에게 아름다움이고 또한 살아서 역사하는가의 여부이다. 복음이 당신의 숨을 멈추게 할 만큼 놀라운 것인가? 놀랍고 자비로운 구세주 예수님을 찬양토록 하는 호흡의 원천이 다름 아닌 복음인가?

아버지시여,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향한 모자란 믿음, 세상 두려움을 향한 지나친 염려, 마음 속 우상, 변명, 그리고 부끄러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소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아름다움과 사랑을 보는, 더 크고 선명한 눈을 허락하소서. 우리 속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소서. 우리는 아둔하지만, 우리는 당신의 것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새로운 감사와 희망에 찬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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