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3일 토요일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글 (스프라울) 나눕니다. 

 

우리는 수십 년 전 리고니어 밸리스터디센터에서 추수감사절 카드를 보냈다. 거기엔 크리스천에게 전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신학의 본질은 은혜이고, 성화의 본질은 감사이다.”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과정에 있어 사람과 하나님의 역할이 각각 무엇인가 논쟁할 때, 우리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로우신지에 대해 이해하면 할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 승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감사의 이유도 바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릴 때 배운 요리문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조건적 호의다.”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은혜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은혜는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은혜를 공로와 관련지어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닌 줄 앎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은혜는 공로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잘 보여 준다. 그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처음으로 ‘완전함’과 ‘공평함’과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에 걸쳐 설명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모든 입술이 그 말을 그치게 될 것이다. 정죄는 오직 죄인들을 향한 선언이기에 하나님의 심판대는 모든 타락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 칭의는 의무를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로써 주어진 것임을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 선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다. 만일 그의 구원과 칭의의 기초가 칭찬받을 만한 예배나 순종에 있었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자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어떠한 공로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믿음 뿐이었고, 그 믿음 자체도 선물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엡 2:8-10).

로마서 4장 4-8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는 핵심 본문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는 은혜다. 일하는 자에게 은혜는 오히려 빚이다. 만일 은혜의 기초를 공로로 삼는다면, 이는 은혜 이전에 갚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일하면 100달러를 주겠노라고 가정하면, 나는 당신이 여덟 시간을 일한 것에 대해 보상해야만 한다. 나는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의무를 이행한 것에 대한 몫을 받을 뿐이다. 당신이 계약을 지키면, 나는 그에 합당한 삯을 주어야 할 의무을 갖게 된다.

주님께 우리는 보상할 길이 없는 빚진 자다. 성경은 경제 용어를 이용해서 구속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고전 6:20). 하지만 우리는 그 값을 도저히 갚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빚을 갚으실 수 있다. 이것이 은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구원을 보증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다. 우리는 어떤 자격도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직 은혜로 그의 공로를 우리에게 베푸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뿐이다. 즉, 은혜의 본질은 자발적인 베푸심이다. 조건이 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

의인이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이고 온전한 기준은 하나님께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매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홀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로를 가지고 계시며, 예수님은 그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다. 우리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어떤 것도 없다. 그것은 순전한 은혜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이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생길 것이다. 교회의 위대한 교사들이 알려 주는 참된 성화의 출발점은 우리의 죄인된 본성을 더 깊이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며, 사랑과 순종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도 더해 갈 것이다. 

은혜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의 연약함을 덮으셨음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할 것이다. 윤리적인 삶을 향한 크리스천의 동기는 단순히 율법이나 규칙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인 삶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감사에 기초해야 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 점을 지적하셨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너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계명을 지키라.” 은혜,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참된 이해는 항상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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