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6일 화요일

 

교회에 관한 글 (데이빗 깁슨) 나눕니다. 

 

죽어가는 교회의 세 가지 증상
야고보서는 스스로 교회의 건강을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증상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그어버린 경계선, 그리고 선한 일을 무시하는 증상이다.
1. 교회가 화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 증상에 대한 첫 번째 힌트를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같은 주제가 1장 26절에 또 나온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3장에 이르러서 야고보서는 우리가 혀를 가지고 저지를 수 있는 진짜 재앙이 무엇인지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그럼에도 야고보서 저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다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주로 목요일에 발생한다. 왜 하필이면 이 날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날이 되면 우리의 혀가 최악의 말을 내뱉곤 한다. 인내심이 짧아지고 성질이 예민해지며 말이 날카로워진다. 형제끼리 싸우고, 부부가 싸우고, 또 부모가 자녀와 싸우면서 집안은 화염에 싸이고 사람들은 화상을 입는다.
조절할 수 없는 혀는 하나의 증상이지 병이 아니다.
2. 교회가 더러운 선을 긋기 시작한다
2장에서 이런 교회의 특징은 편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교회는 사람을 편애한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를,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특정 유형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준다. 내부 군중이 있고 또 외부 군중이 있다. 각종 사회적인 수단과 부요함을 찾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교회는 아주 매력 있다.
이런 식의 사회경제적 구분선이 당신 교회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이런 특정한 선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선을 그을 수 있다. 그렇게 선을 그음으로 우리는 어떤 특정한 물리적 공간과 사회 집단에 포함되어서 안전하다고 느낀다. 어떤 특정 사람들과 유대를 맺거나 다른 특정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무시하게 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기혼자와 독신자, 직장인과 실업자 외에도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선을 긋는다.
사람은 누구나 내게 줄 것이 없는 사람보다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선을 그을 때 하나님과 다르게 긋는다. 하나님은 위험에 노출되고 가난한 자, 약한 자, 줄 게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의 눈앞에서 정결한 종교인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이고 이 세상이 주는 보상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다(약 1:27).
3. 교회가 선한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한다
야고보서가 도전적인 이유는 그 서신서의 수신자가 믿음이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냥 교회도 아니고 복음을 사랑하는 교회였다. 그 교회의 신학은 정통이었고 교회 전체는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다. 말씀이 선포되고 듣는 것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였다.
그 교회가 성경을 사랑한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그런 사각지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선한 일이 없으면, 행함이 없으면 그건 죽은 믿음이다. 너는 겉으로는 살아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죽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
나쁜 말을 하고, 편을 가르는 선을 긋고, 선행은 없다. 우리가 그런 증상을 가지고 의사에게 갔을 때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도움이 될까? 그게 제대로 된 치료가 될까? “좋아요, 그럼 앞으로 좋은 말을 하고, 선을 긋지 말고, 선행을 하세요.”
이런 죄가 어디에서 오는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5-8).
이 구절 속 용어는 인간 구성의 일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의학 용어이기도 하다. “두 마음”이라는 단어는 사실 “두 영혼”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내 속에 “두 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두 개”는 나의 하나됨(one-ness)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두 개로 분열된 자아를 가지고 살 때 조만간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정신과 의사는 당신에게 ‘분열된 자아’라는 진단을 내릴 것이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증상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우물을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분열된 자아이다. 분열된 내면은 외부로도 그 분열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분열된 마음은 분열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악한 생각과 이기적인 욕망의 결과로 시들시들 죽어가는, 영적으로 분열된 교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하늘이 준 치료제, 은혜의 복음이라는 치료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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