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목요일

 

예배에 관한 글 ( 데이빗 베리) 나눕니다.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된 유아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혼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압도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싸우며, 장난감을 던지고, 이것을 하다가 저것을 하는 등 유아원은 온통 난장판 같을 수 있다. 노는 시간 혹은 “자유 놀이” 시간은 아이들의 발달을 위해 비구조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돌보는 성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 아이들이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하고 있는 무질서를 적절하게 정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끄러운 유아원은 용납할 수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러한 무질서가 불쾌한 태도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는 무질서한 졸업식이나 결혼식을 적합하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졸업식이나 결혼식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면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배드릴 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유아실의 혼란스런 이미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묘사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문제는 찬송시도 아니고 가르치는 말씀도 아니었다. 각 사람이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대로 예배드린 것이 문제였다. 그 분위기는 신자들이 성장하거나 불신자들이 복음을 이해하는 것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절을 비교하면, 우리는 신자들을 성장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명령(26절)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절)는 명령과 나란히 간다. 변화는 주님을 흠모하는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부산물이다. ‘자유로운 예배’의 개념은 각 개인이 인도되는 대로 참여하는 예배로, 예배가 연합을 구현해야 한다는 깊은 현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에 다루기 힘든 개인들을 한 가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에 질서가 없다면, 외부에서 관찰하는 사람은 우리가 원래 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을 질서 없이 행하고 있다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기독교적 사랑에 대하여 가르친 후 바로 다음 장에서 예배를 드릴 때 품위 있고 질서 있게 드리며 모든 것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참되며 복음적인 사랑을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4-5)라고 묘사한 후에, “사랑을 추구”(14:1)하는 데 힘쓰라고 촉구하고, 이어서 바른 예배에 대해 묘사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무질서한 예배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예배의 품위는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 특정 단어를 사용한 다른 두 번의 경우는 그가 도덕적 행위에 관하여 말할 때이다(롬 13:13; 살전 4:12).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함께 모이게 하였음을 보여 주거나 아니면 그것이 거짓임을 보여 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다]”(살전 14:33)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고린도에서의 혼란스런 예배는 교회 내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 전파를 저해했다. 불신자들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조차 막았다. 어느 부모든지 극심하게 혼란스런 유아원에 자기 아이를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말하며 질서를 따르지 않는 무질서한 예배에 불신자들이 올지를 염려하며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그는 “믿지 않는 자들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절)라고 결론을 내린다.

처음에, 우리는 이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싶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그가 예배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복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불신자가 ‘비영적’인 상태에 놓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예배에서 사랑이 없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더 중요한 차원의 문제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요 17:11, 21-23).   

예배의 모든 부분은 우리가 서로 연합하고 있음을 반영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셨고, 사셨으며, 이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의 예배가 연합성보다 개별성을 반영하게 되면,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에게 예수님이 사람들을 함께 모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바울이 사용한 용어를 사용하면, 고전 14:16)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하나같이 고백하고, 하나같이 노래하며, 하나같이 기도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전파하신 말씀 가운데 그들에게 언급하시는 것처럼 그들의 기도 속에서도 연합됨을 잘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외부자가 예배의 단일성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모아 거룩한 목적과 거룩한 사랑으로 연합시키시는 모습을 외부자가 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고전 13:8)라고 상기시킨 후에, 계속해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고 말한다.

다음번에 예배드리는 장소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명령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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