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화요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루는 귀한 글 나눕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을까? 오늘날 우리 신앙에 있어서 결코 친밀감이 모자라지 않다. 오히려 과하다. 신앙적 방종은 바로 이런 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얼마 전 작고한 J. I. 패커(J. I. Packer)는 현대 복음주의에 대해 일컫기를 “하나님을 편안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현대적 친밀감의 요구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에 턱없이 부족한 것은 ‘친밀’이 아니라 ‘존경’이다. ‘경외심을 결여한 신앙’은 오늘날 신앙의 보편적 행태이다. 그래서 이 친밀감을 증진할 여러 ‘신앙적 프로그램’이 요구된다. 이 프로그램들은 신자들의 영적인 만족 특별히 친밀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신앙을 제대로 진단한 것이 아니다. 잠언이 증언하듯이,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외라는 태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이 경외감을 더 적극적 형태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경건’이다. 칼뱅에 의하면, 경건이란 ‘말씀을 어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감정’으로 요약된다. 경외감은 그래서 성경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열정이 우리를 신앙적 성숙으로 이끈다. ‘신앙적 프로그램’들은 뭔가 성숙한 느낌, 친밀감 등등의 자기만족적 감정을 가져다주지만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이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하는 것처럼, 백화점 쇼핑이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영적 쇼핑에 불과하다. 진정한 만족과 성숙은 성경을 아는 지식의 성장에서부터 자라는 것이다. 영적이며 심리적인 건강은 우리 감정이 상황에 맞고 우리 이성과 의지가 상황과 관계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위엄과 권능을 가진 분이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서 한 없이 무기력한 존재이다. 하나님과 교제에서 친밀감만 구한다면 우리는 정말 제대로 사귈 수 있을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격이 완전히 다름에도 폭력적이거나 병리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한 없이 자비하시며 우리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밀감이 아니라 경외감을 갖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따라 적정과 절도의 원리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나친 친밀감의 추구가 남녀의 관계에서 권태를 만들 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을 경솔히 대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많은 경우 기독교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훈련들과 행위들은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친밀감의 추구가 거짓 예언과 음성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관계에서 강요가 만들어내는 폭력은 힘 있는 자가 없는 자를 향해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듣거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다른 의미의 폭력이다.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렘 14:14)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
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경고하며 예언하여(겔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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