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월요일

 

흥미로우면서도 도전이 되는 글 (브레드 멕크랙큰) 나눕니다. 

 

오늘날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 신앙이란 본래 ‘불편’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마 16:24), 십자가를 지고(눅 14:27), 박해를 받고(요 15:20; 딤후 3:12), 집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며(눅 9:58), 가족이라는 우선순위를 저버리고(눅 9:59-62; 14:26), 모든 소유물을 포기할 마음을 가지고서(마 19:21; 눅 14:33),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갈 2:20)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찾지 않았다. 나는 와인 한 병이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알고 있었다. 만약 당신을 정말로 편안하게 만들어 줄 종교를 찾는다면, 나는 분명 기독교를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비주의 사회에서 편안함을 찾는 일은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이고, 그래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중에 ‘편안한 기독교’를 추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기독교가 신약성경이 보여 주는 날카로운 기준을 적용하기보다 기분 좋은 와인 한 병처럼 편안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편안한 기독교

바로 여기에 당신의 기독교가 너무 편안해져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여덟 가지 신호가 있다.

1. 당신이 믿는 기독교와 당신이 지지하는 정치 관점이 서로 전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어떤 정당을 온전히 지지하면서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과 그 정치 관점 사이에 아무 긴장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어쩌면 너무 편안한 신앙일지 모른다. 평생 어떤 정당을 지지했든 간에, 확고한 기독교 신앙은 당신의 정치 관점과 여러 지점에서 불일치를 일으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한 가지 정치 성향과 완전히 일치하는 신앙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편안하며 선지자적 증인으로서의 기능을 잃어 버린 신앙이다.

2. 역설이나 긴장 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없다

(삼위일체, 성육신,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성령의 임재 등) 기독교 신학의 난해한 교리에 대해 고민하거나 씨름해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너무 편안한 신앙일지 모른다.

건강하고 불편한 신앙은 당신을 지속적으로 흔들고 들쑤실 뿐 아니라 당신을 들뜨게 만들 것이다. 그런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더 알기 전에는 당신을 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3.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듣고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놀란다

당신의 신앙이 너무 편안하다는 확실한 신호는, 당신을 잘 아는 사람조차도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삶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편안하게 사는 크리스천은 진리를 모르는 이웃들과 동일한 삶을 살며 똑같이 이야기하고 행동해서 쉽게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다.

4. 월요일이 되면 주일에 들었던 설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만약 주일예배에서 들은 설교를 쉽게 잊어버려 교회를 벗어난 뒤에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믿는 기독교는 너무 편안한 기독교일 것이다.

성경적 설교는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도전 받지 않은 상태에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이다(히 4:12).

5.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당신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대화하기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기 좋은 사람들, 당신의 견해, 취향, 기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만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면, 당신의 기독교는 너무 편안한 기독교이다.

복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측면 중 하나는, 복음이 아니면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는 점이다.

6. 도전은 받지 않고 지지만 받는다

만약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당신의 우상을 깨닫도록 하지 않고, 어떤 죄악된 습관들도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신앙이 너무 편안하다는 신호이다.

건강한 신앙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답지만 불편한 과정을 통해 당신을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격렬하게 다듬고 빚어간다.

7. 동료 크리스천과 ‘사랑으로 이야기하는 진리’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범죄나 죄에 대해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오히려 각자도생하며 서로의 삶에 참견하지 않는 편이 언제나 더 편안한 선택이다.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결정을 내릴 때, 그저 무시해 버리는 것이 더 편안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진리와 대치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의 믿음이 사랑 가운데 진리를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너무 편안한 믿음이다.

8.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당신의 성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일은 변화를 수반한다. 비록 언제나 곧게 성장하지는 않겠지만, 크리스천의 삶은 앞을 향해 성장하는 삶이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만약 당신이 거의 자라지 않아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성장한 부분에 대해 언급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의 신앙은 너무 편안한 신앙이다.

불편한 기독교

그렇다면, 왜 ‘편안한 기독교’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까? 편안한 기독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대가가 크고 불편한 길을 걸으며 우상을 부수도록 도전하지도 않고 십자가를 지는 고난도 감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안한 기독교는 편안하고 소비지향적인 세상에 어떤 선지자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는 기독교이다. 편안한 기독교에는 선교에 대한 절박함도 없고 성장을 향한 능력도 없다.

반면 ‘불편한 기독교’는 생명과 변화로 이어진다.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김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자기 희생을 특징으로 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가장 어려운 일을 하셨던 그분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하기 힘든 일을 하도록 하고, 어려운 진리를 끌어안도록 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한다. 그러한 삶은 불편할 수 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 불편함의 이면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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