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9일 토요일

 

큰 은혜가 되는 귀한 글 (가이 워터스) 나눕니다. 

 

예수님을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거나 일반적인 가정에 도전을 제기하는 놀라운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그저 인정해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진리에 관해 우리가 자신의 확신을 재점검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들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요하게 만든다.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도 그런 역할을 한다.

잔치

이 비유는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왕에 관한 이야기, 곧 천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마 22:2). 혼인 잔치는 성경의 보편적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거룩과 기쁨 가운데 자신의 임재를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왕의 명령에 따라 잔치 초대장이 발송된다. 그런데 왕이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한다(마 22:3). 그들은 여러 변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보낸 종들을 함부로 대했기에 왕은 그들을 벌한다(마 22:5-7). 그리고 다시 종들을 파견한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마 22:9).

여기서 예수님은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로, 그 다음 이방인에게로 전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신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메시지를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이 거부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공포하시고, 결국 로마의 군대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파괴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대인의 거부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여기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10)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

왕이 손님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고”(마 22:12) 온 자를 발견한다. 이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를 전혀 말할 수 없다. 왕은 그에 대해 종말론적 심판을 거행하며 사환들에게 명령한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예수님은 이 비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한 마디의 경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신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청함을 받은 자

바로 이 의미심장한 최종 선언을 이해하는 것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의 뜻은 무엇일까?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여기서 사용된 ‘청하다’와 ‘택하다’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청하다’라는 단어는 이 비유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헬라어 본문에서 종들은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게”(마 22:3)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여기서 청함 받은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을 의미한다(마 22:4, 8). 종들은 이방인들을 ‘청하여’ 오게 하도록 명령을 받는다(마 22:9). 14절에서 “청함을 받은”으로 번역된 단어는 3, 4, 8, 9절에서 ‘청한’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군에 속한다.

이 패턴을 알면, 비유에서 언급되는 청함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청함은 종들, 즉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더 나아가 신약시대의 사역자들을 통해 부르시는 일, 바로 하나님의 초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듣는 자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이 명령을 거부하는 일도 발생한다. 예수님은 청함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책임져야 할 과실이 있다고 교훈하신다.

택함을 입은 자

청함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그들을 “택함을 입은” 자, 즉 헬라어 의미에 따르면 선택된 자라고 부르신다. 이들은 성부가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이다(엡 1:4). 오직 택함을 입은 자들만이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돌아오실 때 구속된 무리에 속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있어야 청함에 진심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청함을 곧 택함이라는 의미로도 표현한다(롬 8:30; 딤후 1:9).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청함을 받았으나 택함은 받지 않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

답은 성경 저자들이 ‘청하다’라는 말을 언급하는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있다. 즉,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청하다’를 외적 의미로 언급하신다. 이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청함은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부르는 명령이다.

또 성경 저자들은 ‘청하다’를 내적 의미로도 언급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내적 부르심을 언급하는데, 이는 복음의 외적 부르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령이 내면에서 효과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역사를 의미한다. 이 내적 부르심은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게 한다. 외적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만, 선택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때에 내적 부르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에게 복음은 실제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6).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고 동요하게 만드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교훈은 무엇일까?

첫째, 하나님이 그의 메신저를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이를 거절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심을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날에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교묘한 방법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외적 부르심에 입술로만 반응하고, 그 부르심으로 제시된 예수님은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거절 역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한다.

여기서 나쁜 소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마음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부르심을 거부하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외적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신다. 구원은 오직 은혜의 결과이다. 어쩌면 이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 불안을 통해 우리가 진리를 보도록 이끄신다. 즉 오직 은혜로만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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