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월요일

 

거룩성에 관한 글 (존 블룸) 나눕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일은 영적으로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첫 번째 경고 표지이다. 

외적으로 모든 것이 좋아 보일 수 있다. 우리 가족이 모두 건강할 수 있고, 사역이 번창할 수 있으며, 우리가 자신의 영적 은사를 인식하고 능력 있게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내적으로 우리는 방황하고 있을 수 있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영적 건강의 표지가 아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이유들로 가족과 사역이 힘들고 잘못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매우 은밀하게 죄에 연루되어 있을 동안에도 큰 능력으로 영적 은사를 실행한 예들이 있다. 그러한 예들 외에도 외적 현상들은 보통 영적 침체의 표시를 뒤늦게 보여 준다. 우리의 영적 침체가 표면에 드러날 때에는 종종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이다.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외하는지 지켜보라

우리가 지켜보아야 할 사항은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감각이라는 말은 그 교리에 대한 지적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우리에게 그 사실을 확인시키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감각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 두려움으로 경외할 때만 우리에게 실제로 느껴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감각은 우리가 죄를 두려워 하게 되는 명확한 증거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거룩성 대한 우리의 감각 상실은 항상 죄의 사악함에 대해 감각을 상실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을 때 죄도 두렵지 않게 된다.

습관적으로 죄에 빠지는 일에 관대한 것과 죄의 종이 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요 8:34)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표시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상태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말해 주신다. ‘네 손을 찍어 내버리라.’

‘영원히 고통당하는 형벌’은 사실이다

마태복음 18장은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내용이다. 예수님은 죄의 극단적인 결과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마 18:7-9).

8절에 나오는 ‘영원한 불’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라.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과 가장 저명하고 믿을 수 있는 신학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지옥이 ‘영원히 고통당하는 형벌’이라는 사실을 단언했다. ‘영원히 고통당하는 형벌’이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두려운 현실을 묘사한다.

은유지만 과장은 아니다

나는 ‘극적으로 무서운’ 그리고 ‘절대적으로 두려운’이라는 표현을 매우 조심스럽게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이 표현들은 지옥을 “죄의 삯은 영원한 죽음”(롬 6:23)이라고 묘사해야 할 때 잘 어울리는 말들이다. 아무도 이것을 경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의 종이 되어 예수님으로 인한 자유를 얻지 못한(요 8:36)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될 현실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손을 찍어 내버리고 눈을 빼어 내버리라는 극단의 은유를 사용하신 이유이다. 극심한 위험은 극단의 탈출 수단을 필요로 한다. 찍어 내버린다는 이미지는 은유지만 과장은 아니다. 문자적으로 손이나 눈의 상실이 죄의 근본적 문제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은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걸림돌을 급진적이고 고통스럽게 절단하는 일이 교활하고 기만적인 죄의 올가미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길일 수 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요소가 우리의 습관, 관계, 직업, 어떤 개인적 자유 등 무엇이든지, 우리는 이를 찍어 내버리는 ‘절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들을 유지하며 영혼을 잃기 보다는 이들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편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모든 ‘손’을 찍어 내버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감각을 잃으면, 마태복음 18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경고가 우리에게 닥친다. 우리는 그러한 경고가 우리와는 상관없다고 여긴다. 우리는 그 경고가 우리에게 적용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이 세상적 관심을 갖고 세상을 추구하며 죄에 무감각해진 다른 형제자매에게 적용된다고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공적으로 정통 교리를 지지하고 노력하는 일들이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여기며 위로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적인 삶에서 우리가 죄를 수용하고, 기도 없는 삶을 살며,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절박함 없이 살아간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 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이다. 만일 우리가 사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존중하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마 7:13).

예수님은 이러한 치명적인 오염에 물든 사람에 대한 치료를 제공하신다. ‘너를 실족하게 하는 모든 손을 찍어 내버리라.’ 그리고 예수님은 진실로 말씀하신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4:7). 우리가 단지 이 길에서 모험을 했거나 혹은 거기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제’ 우리 발이 죄에 묶여있게 하는(히 12:1) 것이 무엇이든지 회개하고 그것을 찍어 내버릴 극단적인 수단을 택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주님에게 간청해야 하며 주님을 두려움으로 경외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새롭게 되도록 무엇이든 해야 한다.

생명을 선택하라

크리스천에게 주님을 두려움으로 경외함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조화를 이룬다. 이사야는 예수님에 관하여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사 11:3)라고 예언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경외함으로 기뻐했고, 하나님은 우리도 이러한 기쁨을 누리기 원하신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잠 14:27) 하고,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실]”(시 2514)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 9:10). 반대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의 근본이다. 그러한 지혜에 대한 보상은 영원한 생명(요 3:16)과 충만한 기쁨(시 16:11)이다. 그러한 어리석음에 대한 보상은 절대적인 두려움이다.

우리가 건강한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약화되고 그분의 거룩성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행동을 취할 때이다. 모든 어리석은 일을 찍어 내버림으로 회개하고, 신명기 30장 19절에서 말하듯이 생명을 선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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