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주일

 

소망에 관한 글 나눕니다. 

 

부활의 소망

첫 세기부터,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부활에 뿌리고 있고 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가 죽을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우리 몸이 무덤에서 살아날 때 일어난다(고전 15:51-54). 

성경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소망을 이야기한다(고후 5:8; cf. 빌 1:21). 유서 깊은 신앙고백들은 우리 영혼과 마찬가지로 우리 몸도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고, 심지어 우리 몸이 무덤에 있을 때에도 그러하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7).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듯이, 이와 같은 죽음에는 좋은 것이 있다. 바울은 이것을 주와 함께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육체가 없는 상태의 우리 영혼에는 무언가 불완전한 것이 있다. 바울은 “주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몸으로 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 후에 내 몸은 땅에 있을 것이며, 내  영혼은 죽음 후에 집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전적으로 온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두 구절 앞에서 바울이 말하는 대로, 우리는 몸으로 “살고” 있다(고후 5:6). 온전한 나는 몸과 영혼이기 때문에, 내게 필요한 것은 부활이다. 그 다음에 나는 다시 온전하고 완전하게 살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 곧 모든 부활 이야기들을 능가하는  ‘그’ 부활 이야기를 가져다준다. 성경에는 죽은 다음에 살아난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더 이상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다시 사셨고, 결코 다시 죽지 않으신다. 그는 죽음의 영속성을 깨뜨리셨다. 부활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성금요일에 어찌어찌 “집에 가셨다”거나 성토요일에 “다시 온전하게” 되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 부활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일요일의 이야기다. 그때 예수께서는 온전해지셨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제자들이 그 첫 성주간에 고대해야 했던 것과 동일한 것을 고대하고 있다. 그때 그분의 부활과 언젠가 나의 부활이 그것이다. 니케아 신경에서 고백하는 대로, “우리는 죽은 이들의 부활과 새로 오는 세상의 삶을 고대한다.” 

몸과 이 땅의 소망

기독교 역사 초기 몇 세기에 유행했던 이단들 중 하나가 영지주의였다. 영지주의자들은 육신의 존재를 벗어버려야 더 높은 영적 차원으로 탈출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부활절은 육신의 존재는 부활해야 하는, 본래 좋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부활절은 또 이 땅은 좋은 곳이라고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바라보시며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인정하건대, 이 땅은 이 순간에도 너무나 엉망진창이며,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말한다(창세기 3장).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위해 지음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온전하게 고쳐진 몸으로 부활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래서 우리는 구름 위에 살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 처음부터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고, 또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 땅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의 집이다. 그렇다. 우리는 부활과 “새로 오는 세상의”―정의가 깃들어 있는 “새 땅”의―삶을 고대한다(계 21:1; 벧후 3:13).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와 함께 살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계 21:3). 

우리 몸과 이 땅은 좋은 것이기에, 몸으로 이 땅에서 해야 하는 것들도 좋은 것이다. 일은 좋은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그 남녀에게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도록 세상에 온갖 선물들을 심어 두셨고, 우리가 찾아내기를 바라신다.

구속의 소망

부활절은 부활의 이야기이므로, 부활절은 또한 구속의 선포다. 사망이 패했으니, 다른 것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더 큰 것은 더 작은 것을 의미하는 법이다. 다른 문제는 모두 무색해진다. 죽음이 정리되면 다른 것들도 정리된다. 바울이 말했듯이,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 우리도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고 있다”(롬 8:22-23). 모든 것이 우리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게 망가져 있다”고 밥 딜런은 노래했다.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 있지는 않을 것이다(계 21:4)

부활절은, “혁명이 시작된 날”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낡은 질서에 대한 반란을―죽음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병이 지배하는 망가진 세상의 전복을―일으켰다. 이제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앞으로 올 세상의 삶을 고대한다.

이는 나에게 부활절에 대한 마지막 생각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해마다,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당신은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소망할 수 있을 뿐이지만, 그것을 바랄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니케아 신조가 말했듯이,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고 죽은 자들이 살아날 때, “여전히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살전 4:17). 당신과 내가 여전히 살아 있는 무리에 들 수도 있다. 우리가 그렇더라도, 부활이 우리에게 상관없는 것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미 죽은 (또는 주께서 오시기 전에 죽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부활절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회하게 될 것임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죽음 후의 삶 후의 삶에서, 우리는 온전해질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함께 집에 거할 것이다. 그날이 속히 오기를.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계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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