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토요일

 

귀한 글 나눕니다. 

 

모든 좋은 이야기 속에는 갈등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방랑이 아니라, 가치 있는 모험이 되기 위해서는 장애물과 도전을 마주해야 한다. 모험으로 가득한 탐구를 지속하려면,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한다는 약속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이킹할 때 정상에 초점을 맞춘다.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비전이 지칠 때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산 정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경치와 맑은 공기 그리고 넘치는 만족감―만으로도 우리는 아무리 지쳐도 계속 산을 오르게 하는 영감을 받는다. 

언제나 나아가며

인간은 본성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우리 마음에는 목적지가 있다. 휴대폰에는 특정 기술과 지식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수많은 앱이 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비디오 게임은 도전과 자극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 몸이 복종하도록 훈련하는 데에는 영감이 필요하다(고전 9:27). 그래서 보통 각종 동호회는 코치와 함께하는 피트니스와 운동 루틴을 중심으로 만들어지곤 한다.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나 자신을 더 발전시키겠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 교사는 학생이 지식을 쌓도록 돕는다. 또한 각종 강사와 코치는 수강생이 새로운 언어나 악기를 배우거나, 또는 운동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이처럼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더 이상 인격을 성장시키는 것에도, 새로운 취미를 시도하거나, 집과 마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데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 삶의 개선에 대해 아예 무관심한 상태에 빠진 사람을 보는 것은 안타깝다. 목표 의식을 잃어버리고, 아예 야망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슬프다. 왜일까? 인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추구해야 할 목표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뭔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반면에,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정체성의 기반을 오로지 성취에만 두는 경우에도 문제가 생긴다. 산비탈을 하나하나 이루는 작은 걸음에서만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성취를 통한 완벽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우리는 하루하루를 초조함 속에 살다가 지쳐서 나가떨어질 것이다. 

다른 추구

때때로 종교인은 삶의 여정을 산 정상을 향한 오르막길로, 그리고 정상에 다다르게 되면 마침내 영적 성장과 탁월함을 성취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르다. 기독교가 말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상승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강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산에서 내려오셨다. 우리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단지 하나님의 하강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강림에는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일으키시겠다는 목적이 담겨있다. 그래서 우리도 성령의 능력으로 상승한다. 십자가 저편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산 정상을 향한 길과 닮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 여정 또한 모험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어려움을 예상해야 한다. 신약은 믿음의 경주를 장애물 경주로 묘사한다(갈 5:7, 살전 2:18, 히 12:1). 정상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기에 설렌다. 그 여정에 좌절의 위험이 없다면,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장애가 없다면,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항상 존재하는 진짜 위험이 없다면, 우리는 차라리 동네 주변을 생각 없는 걷는 편안한 산책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가치 있는 목표일수록 헌신과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박사 학위를 취득하거나, 마라톤을 뛰기 위한 훈련을 하든 간에, 힘들수록 따라오는 대가는 가혹하다. 성공을 맛보고 마음과 몸을 변화시키려면, 미래에 만날 나의 모습에 대한 비전을 확고히 하고 거기에 집중해야 한다. 

참회의 길

당신이 나와 같다면, 미래의 자신을 생각할 때 마음이 들뜨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위축되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결점과 실패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부분에서 힘들어하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모를 수가 없다. 같은 곳에서 계속 걸려 넘어지고 있지 않은가? 교회가 학교라면, 지금 내 수준은 잘해야 간신히 합격하는 정도이다. 교회가 병원이라면, 지금 입은 상처와 부상이 너무 심각해서, 차마 건강한 내일의 나를 꿈꿀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라! 자기 평가는 원래 좋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당신의 눈에는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만드는 남아 있는 죄가 더 잘 보일 것이다. 거룩함에서 자라면 자랄수록,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높은 산일수록, 정상은 더 멀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여정을 당신보다 훨씬 더 오래 또 충실하게 걸어간, 과거의 신앙 선배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당신은 결코 그들이 자신의 발전에 대해 자랑하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대신 이런 말이 들릴 것이다.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그에 대한 응답으로, 당신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거 같아.” 그냥 그리스도의 명령 중 몇 가지를 확실하게 지키고, 넘어짐을 최소한으로 유지하기만을 바랄 것이다. 이처럼 산을 오르는 길은 때때로 절망적일 수 있다.

그런데 좋은 소식이 있다. 기독교가 마치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표준을 세우는 것 같지만, 동시에 길을 잃은 사람에게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잠 24:16). 복음은 용서에 관한 좋은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당신의 불의를 덮는다. 엄청나게 높은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 바로 옆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가 자리 잡고 있다. 급진적 이상은 급진적 자비로 인해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비는 결코 그 표준을 낮추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표준이 그분의 자비를 감소시키지도 않는다. 

실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답

16세기 전, 교회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잔인한 박해 이후 수십 년에 걸친 긴장을 직면했다. 그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향에서 쫓겨났다. 일부는 생계를 잃었고, 또 목숨을 잃은 이도 적지 않았다.

기독교 신앙과 관습에 대한 로마의 탄압에는 신성한 종교 문서의 몰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문과 죽음의 위협에 일부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포기했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신약성경을 당국에 넘겼다. 한편, 많은 사람이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켰고, 그 결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고난의 시간이 끝나자 핍박 때문에 신앙을 버리거나 성경을 넘겨준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그들도 회개하면 돌아올 수 있었을까? 극심한 핍박으로 흔들리던 사제와 주교가 다시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크고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 그룹(북아프리카의 주교인 도나투스(Donatus)의 이름을 따서 “도나투스파”로 명명됨)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복귀한 지도자가 집례하는 세례와 성만찬은 아무런 능력이 없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성화와 관련해서 수천 개의 글을 남겼다. 그런 그의 여정은 그를 도덕적 해체에서 도덕적 미덕으로 이끌었다. ‘고백록’에 드러난 아우구스티누스의 대담한 자기 평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도 도나투스파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거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결코 기독교의 높은 이상을 낮추거나 죄와의 싸움 내지 투쟁을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야말로 약한 자, 의심하는 자, 그리고 “실패자”를 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소위 말하는 도나투스파 논쟁에서 드러난 아우구스티누스의 지도력을 통해 교회는 거룩함과 자비를 모두 다 옹호했다. 산꼭대기로 오르는 길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제 그 길은 회개의 길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를 손짓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넘어짐을 덮을 것이다. 복음은 순결하고 건강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패배자, 실패하고 나약한 자, 그리고 타락한 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음’이라는 미덕의 산꼭대기에 이르는 길은 참회의 길이다.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가 없는 삶이 아니다. 회개하는 삶이다. 

죄인에서 성자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는 다른 세상(otherworldly) 윤리에 대한 철저한 충성이다. 그리고 그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향해서도 활짝 열려있다. 성화의 학교는 지금 한창 수업 중이다. 야전병원은 지금도 부상자들을 수용하고 있다.

이상(ideal)과 적절하게 타협하려면 도덕적 노력이라는 모험의 수준을 낮춰야 한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영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이상을 낮추는 것은 결국 우리의 악덕을 미덕으로 바꾸는 것이다.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뭔가 모자란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진 빚으로 왜곡한다. 

정통은 죄인을 구원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정통은 죄인을 성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 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제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 

물론 하이킹은 우리를 지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산을 오르다 보면 비틀거리기도 하고 또 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고 은혜의 선물을 힘입어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간다. 이미 나를 사로잡고 있는 정통을 더 굳게 붙잡겠다고 다짐하며 우리는 다시 나아간다. 우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실패할 때마다 회개를 잊지 않는다. 

미래의 승리로 가는 좁은 길은 현재의 회개라는 길이다. 그 누구도 죄 없이 정상에 도달할 수는 없다. 오로지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죄 없는 구주의 공로를 통해서만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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