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와 믿음

사도행전 강해 (15장 1-11절)


1. 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중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다름 아닌 율법과 구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지 모르나, 유대인 출신의 초대 교인들에게는 정말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 그리고 이방인 (헬라인)입니다. 이방인 출신의 성도들에게는 기독교라는 것이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구원의 소식이었지만, 유대인 출신의 성도들에게는 그저 전통적 유대주의의 계승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기독교에 들어오면 반드시 유대인들이 따랐던 모든 율법을 함께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중에서도 할례는 모세 때부터 행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표식이었기에, 이것은 반드시 하나님 백성으로서 지켜야할 규례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할례를 받지 않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즉 유대인 출신의 성도들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보다는 할례를 비롯한 율법이 우선이 된 것입니다. 최소한 믿음의 증표로 할레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민족적 독선주의에 불과한 이단적 사고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 구원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산일 뿐입니다.

 

2. 이것을 우리는 크게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가 없는, 구원의 복음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바울은 서슴치 않고 변론을 벌인 것입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라면, 웬만한 것이면 다 참았던 바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하여 이 난국을 뚫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증거하지요. 우선 자신의 사도의 권위를 내세워,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날카롭게 이야기합니다. 둘째로, 첫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것과 동일하게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신 것을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동질성을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일한 새로운 피조물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유대인들인 자신들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주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성도들에게 요구할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넷째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같은 교회 식구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3. 우리가 무엇인가를 행함으로 또는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는 율법주의라고 부르지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껍데기의 것들(주일, 헌금 등등의 것들)과 내적인 것들(사랑 등의 성령의 열매라 부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 무엇도 구원을 이루는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의 선한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불완전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격이 되기 때문이지요. 구원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번의 죽음의 대속으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죠. 그래야 그것을 은혜(선물)라 부르지 않겠습니까? 그 믿음 또한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으니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 참된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서 주님의 선하심이 회복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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