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신적 존재입니다(창1:26). 비록 죄의 권세로 인해 완전 타락한 우리였지만 영원한 말씀, 예수의 은혜로, 우리는 영원한 신적 존재로 회복되었습니다.

2. 이 놀라운 회복의 부르심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순종의 삶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3. 곧 구원과 거룩, 그리고 감사와 고난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4.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와 주관하심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앎의 범위가 같고 이해의 정도가 같다면, 더 이상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절대적 존래라 하더라도, 좋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을 공급해 주는 존재라면 더 더욱 예배의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에, 또한 우리가 이해 못하는 절대적 존재이시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5. 우리의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죽음의 고통이 있어도, 그것이 이 세대와 싸우는 것이라면, 그럼으로 인해 우리가 새롭게 변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 가는 것입니다.

6. 그러한 영적 예배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게 합니다. 즉 구원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가며, 그 뜻을 위해 비전(소원)을 품고 이루어 나가는 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7. 말씀을 순종하기 위한 기도의 삶을 훈련한다면, 이제는 마음대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반드시 큰 일을 이룰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로서 주님의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우리도 우리의 삶 마지막 순간에 자신 있게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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