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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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시작은 4장 마지막 부분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한다. 즉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용서하기를 하나님이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5장 1절 말씀의 시작은 이렇게 표현한다.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즉 남을 용서하라는 강한 말씀의 전제조건이 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만을 강조하며 5장을 시작한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사랑을 입은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하며(1절), 그 하나님의 사랑에 걸맞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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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속의 제사는 ‘향기로운’ 제사이다(2절). 거룩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사도 바울은 강조한다. 하나님을 본받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사는 것은 향기롭고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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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받는다(5절). 하나님을 본받는 자들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상급이기도 하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덧 입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더럽고 추하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반드시 임할 것이다(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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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거룩하지 못한 모습을 열거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음행, 더러운 것, 탐욕, 불결, 치사함, 비아냥 거림, 진실 아닌 거짓 등등의 말하기 조차 부끄러운 모습들(12절)… 우리 믿는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더러운 모습에서 자유할 수 있을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에게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모습이 더욱 그러할 수 있다.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를 훈육하며 채찍질하고 있는 사랑의 말씀들이다. ‘싸우라’는 강한 메세지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주님의 은혜는 아픈 것이다.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뉘우치고 계속해서 자신을 성화시켜 나가는 것… 우리의 숙제이다. 남이 지적해 주면 어느 누가 기뻐하며 고치겠는가? 말씀만이 그 권위와 은혜를 가지고 있다. 지금 그 말씀이 말한다. 이 기회를 선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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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걸어가야(행해야) 할 목적지는 착함,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이다(9절). 그것이 바로 더럽고 어두움에서 방황하는(걷는, 행하는) 우리 이전의 삶이 아닌, 구원 이후의 거룩한 삶의 모습이다. 10절의 말씀은, 그러한 삶의 태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선포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찾으라고(시험하여 보라) 명령한다. 과연 그렇다! 착함과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을 찾기 위한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이다(참조/롬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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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에서(11-14절), 기가 막힌 표현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바로 ‘폭로하라’(책망하다,11절)라는 명령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빛의 자녀들이며, 빛의 열매를 항상 거룩한 부담감으로 안고 사는 교회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며 또한 그 예배를 통해 일하신다. 말로서 선포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영적 의무도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예수처럼 걷고 살면 된다. 그것이 착함, 의로움, 그리고 진실을 향한 우리의 최선의 노력이라면, 그것이 바로 빛이 되는 것임을 잊지 말자. 그러한 우리의 빛으로서의 삶을 통해 어두움은 폭로내며, 더러움은 드러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금 더 지혜롭자. 우리의 삶의 예배를 통해 더러움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며 부끄러워 할 것이다.
적용해야 할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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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을 입은 것에 대해 묵상해 보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먼저 입었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몇 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10점 만점에서^^) 낮으면 낮은데로, 혹은 높으면 높을수록 우리에게 당연히 나타나야 할 경건의 모습은 무엇일까? (모법 답안-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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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두움의 모습과 빛의 모습,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강할까? 자아성찰에 미숙한 교회의 세대에 정말 깊이 있게 묵상하며 아파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