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계명 /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을 놓는 것을 말한다. 즉 우상숭배이다. 탐심(골3:5) 자체가 우상이며, 재물(마6:24) 심지어 식탐(빌3:10)이 우리의 우상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뻐하고, 때론 그분을 두려워해야 할 우리의 가슴판에 재물을 비롯한 온갖 탐심이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를 사사기의 역사가 증거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하게 된 것은 ‘말씀’을 몰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는 일에 집중하지 못할 때(요일5:18-21), 우리는 우상을 섬기게 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말씀 중심의 삶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의 자리에 세상의 것을 갖다 놓는다. 말씀 충만이 우리를 자유케 한다.
제 2 계명 /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형상도 만들지 말며…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우상’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이미지나 형상’을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섭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분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려고 하고, 들으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형상에 약하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의 인지 범위 내로 축소시키지 말라는 말씀이다. 그것은 곧 우리를 위함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 그것이 곧 우리가 섬기고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교회이다.
제 3 계명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모든 이름은 그 자체로서 정체성을 설명한다.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왜냐하면 정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실 이름이  없는 분이다. 모세의 질문에 ‘스스로 있는 자’라고만 대답하신 분이다. 어떤 특정한 이름으로 하나님의 정체를 설명할 수 없기에 그렇다. ‘하나님은 이런, 저런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우리는 심각한 조심성을 보여야 한다. 자신이 느끼고 확신하는 하나님이, 남에게는 다른 느낌과 확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해와 앎의 구조만으로 하나님을 단정하여 이름화 하지 말라.
제 4 계명 /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은 안식일 날, 두가지의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거룩’을 훈련받았다. 첫째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이며(출20), 둘째는 종된 삶으로부터의 자유이다(신5). 즉 노동과 쉼의 거룩이며, 구원에 대한 감사와 소망이다. 이스라엘은 안식일 날마다 이 두가지를 기억하며 묵상하는 훈련을 받았다. 즉 안식일의 정신은, 하나님처럼 살라는 것과, 구원에 대한 감사와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이다. 즉 메시야에 대한 그림자적 계명이다. 율법을 완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문자적 안식일의 계명은 우리에게 무효하다. 더욱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매일매일의 삶이 우리의 안식일이어야 한다. 창조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구약이 말하는 안식일과는 다르다(골2:16-17/롬14:5).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가 다르듯이,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모이던 초대교회의 전통이다(요20:19-22). 이날은 구원의 거룩한 소망의 삶을 사는 이들의 공동체적 삶의 장이며, 고백이며, 부활의 승리에 대한 믿음을 선포하며 동시에 그 힘을 재충전하는 날이기에, 구약시대의 안식일 못지 않게, 우리가 지켜 함께 모여야 할 귀한 날이다.
제 5 계명 / 네 부모을 공경하라
‘공경하다’라는 말은 무게를 인정하라는 의미이다. 가치와 비중을 인정하며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이다. 마치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듯(잠3:9/사24:15) 부모의 권위의 무게를 인정하라는 것이다(출20:12/신5:16). 값어치의 무게를 인정한다면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것이 생각(두려움)과 행동(순종)이며 당연한 배려이다. 바울은 그것을 ‘주 안에서’라는 복음의 핵심을 첨가시켜 설교한다. 아름다운 도덕적 가치 뿐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말씀 안에서 지혜롭게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요하는 것이다. 게다가 종과 상전의 관계도 함께 언급함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끼리의 올바른 권위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제 6 계명 /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지니라”의 중요성은 이스라엘에게 대단했다. 사형에 속하는 죄몫이다(창9:6, 출21:12, 레24:17, 민35:16). 문자적으로는 관계없는 듯한 이 계명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로, 은혜의 시대에 살 모든 성도들을 위해 재해석, 적용하셨다(마5:21-24). 마음과 말로 타인을 정죄하고, 분노을 품으면, 그것이 곧 살인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이 언급하는 ‘라가’ 또는 ‘미련한 놈’이란, 상대방을 매우 헐뜻는 말이다. 타인의 존재 자체를 ‘헌 것’, ‘비어있는 것’으로 경멸하는 것이다. 우리가 남에 대한 분노가 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정녕 그 ‘남’이 텅 비어있는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분노를 조금 깊이 있게 재단해야 하지 않을까?
제 7 계명 / 간음하지 말라
여기서 말하는 ‘간음’이란, 가정이 있는 다른 이성을 범하는 것이다. 가정의 중요성을 하나님께서는 말하신다. 왜일까? 가정은 나 자신 외에 남과 함께 이루어야 할 가장 작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문자적 의미의 간음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가정의 범주를 깨는 것이라면, 신약시대의 교회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성’이라는 귀한 하나님의 선물을, 결혼이라는 복된 또 다른 교회와 상관 없이 그저 음흉한 마음을 갖는다면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제 8 계명 / 도둑질하지 말라
모세 시대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상습화 되었던 시기였기에, 사람을 훔치고 유괴하여 노예의 상품화를 자행했던 추악함을 금지하는 계명이었을 것이다(출21:6, 신24:7).  즉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작지만, 동시에 가장 소중한, 한 개인을 상품화한다는 악행을 금하는, 결국 하나님 나라를 소중히 여기는 귀한 또 다른 말씀이다. 자신의 욕심이나 입지를 위하여 사람을 이용하는 모든 악함은 도둑질이다(삼하15:6). 속임수로 이익을 취하는 상거래(레19:35, 신25:13-15)나 돈을 빌려주고 고리를 취하는 것(출22:25, 레25:35, 신23:19)도 도둑질이다.
제 9 계명 / 거짓 증거하지 말라
‘서로의 관계성’을 ‘진실’에 둘 것을 명령하고 있다. 잘못한 것은 분명히 말하고 고쳐야 하지만, 거짓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 것을 명령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거짓 증거로 인해 십자가에 죽으셨다. 자기 중심의 삶을 사는 현 세대에, 타인을 보호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사실을 곡해, 확장해서 사람을 함부로 일반화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해 관계에 따라 남을 비방하며 부정적인 이미지로 평가절하하는 것을 주님께서는 싫어하신다. 우리의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고 산다. 남말이 그저 재미있는(잠18:8, 26:22) 이 악함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최소화 되기를 바란다.
제 10 계명 /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
‘탐하다’라는 말은, 즐거움과 만족 따위의 감정을 품고 있는 ‘소유의식’을 의미한다. 그러니 내 것은 얼마든지 탐해도 된다. 문제는 남의 것을 즐기는 것이다. 탐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불순종이다(창3:1-6). 원죄의 시작이기도 한, 이 강력한 힘을 이기기 위해선 고도의 경건의 훈련이 필요하다. 탐심은 우상숭배(골3:5)임을 명심해서 하나님 앞에서 승리하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Similar Post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