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롭게 여겼으며 (이사야 43:21-22)
1. 교회는 사람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물론 그 사람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값진 피를 이 세상에 주고 사신 것이 곧 교회이다. 그 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구원받은 백성들의 모임인 것이다. 절대로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자꾸만 망각해 버린다.
2. 그렇다면 그 교회는 무엇을 기준으로 운영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로 이것이그 어떤 다른 종교와도 다른 점이다. 교회의 리더들이 자신들의 철학으로 교회를 운영해서는 아니 된다. 말씀이어야 한다. 성도들은 말씀에 익숙하도록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 태초 이전부터 존재했던, 바로 그 말씀에 모든 교회의 사람들은 통치되어야 한다. 얼마나 중요한 핵심인지 모른다. 말씀 외에 그 어떤 것이 교회의 축이 되어진다면 그 교회는 영원한 교회를 낳지 못한다. 왜냐하면 말씀만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3. 그 말씀이 교회가 해야 할 찬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만약 이사야 43장 21절의 말씀이 없었다면 우리는 교회음악의 찬양에 대한 큰 주춧돌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43장 21절을 자세히 들여다 보자. 말씀은 주어와 목적어를 분명히 하고 있다. 주체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 또한 명확하다. 하나님이 백성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드신 이유를 두가지로 정확하게 정리하고 있다. 하나는 ‘나를 위하여‘이고 또 하나는 ‘찬송을 부르게 함‘이다. 즉 하나님을 위하여 찬송을 부르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있는 이유이고 사는 이유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기분이 좋지 않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라고? 태어나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나는 이유도 찬송, 힘들게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공부하는 것도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직장을 구하는 것도 찬송을 목적으로, 돈을 벌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도 찬송하기 위해, 자녀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키우기 삶의 현장에서 정말 힘들게 일하는 것도 찬송하기 위해… 이런 것들이 말이 되는가? 말이 된다. 아니 바로 그것이 진리이다. ‘찬송‘이라고 하는 것은 칭찬이다. 인정하는 것이다. 무릎을 꿇는 것이며 감사하는 것이다.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 공부하는 것도 감사,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감사, 결혼도, 가정을 책임지는 것도… 그 어떤 것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찬송‘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고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아래 나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4.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았다고 말씀은 계속해서 이야기 한다 (22절). 이 22절의 말씀이 또한 얼마나 귀한지! 완벽한 찬송이 무엇일까를 이해하고 말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21절의 찬송의 단어와는 달리 22절에서는
‘부르다‘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지고 있다. 찬송을 목적으로 우리를 만들었다고 선포한다면, 그 다음에는 찬송을 했는지 혹은 찬송을 부르지 않았다고 해야 맞지 않는가? 하지만 그저 ‘부르지‘
아니 했다고만 표현하고 있다. ‘부르다‘라는 단어는 ‘울다‘, ‘통곡하다‘ 의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5. 바로 이것이다. 찬송을 부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은 운다는 것이다.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삶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그 자체가 찬송이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은 정말로 계시는가?” 혹은
“하나님, 삶이 왜 이렇게도 힘이 드는가요?” 등등의 진솔한 고민 아닌 고민이 있을 때가 많다. 그럴 때에, 우리가 어떻게 찬송을 드릴 수가 있을까? 젊은이들이 일찍 죽음을 맞이 할 때, 사랑하는 이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날 때, 사업에 크게 실패하여 집을 잃을 수 밖에 없을 때… 무슨 찬송을 부른단 말인가? 바로 이럴 때에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 우리를 위하여 일하심에 대하여 통곡하는 것이다. 주님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가며 주님을 부르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해답이 없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르짖는 것이다. 바로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평안을 주시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것이 세상이 줄 수 없다던 바로 그 평안이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울부짖음, 그것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그분이 받기 원하시는 찬송이다.
6. 이러한 울부짖음의 찬송을 부르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지겨워 하지 않는다. 22절의 ‘괴롭게 여기다‘라는 말의 원래 뜻은 지겨워하는 것을 의미한다. 값어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울부짖을 수 없고 찬송할 수 없고 결국엔 다른 것을 찾아 떠나고 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우상‘이다. 돈,
권세, 명예… 현실의 세상이 줄 수 있는 것들, 심지어 우리의 취미, 특기, 스포츠 등등의 것들도 매 한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만들고 허락하신 이 세상의 문화거리들, 즐기는 것 이상의 값어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매여 산다면, 그것으로 안위를 얻는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하나님을 더 이상 찾지 않게 하는 것들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머리로 만든 이 세상으로 인해, 주인 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지겨워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7. 찬송은 노래 이상이다. 인생이며, 울부짖음이며, 통곡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