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에 관한 글 (폴 레비) 나눕니다. 도전의 은혜를 찾습니다.
교회의 입장에서 또는 목회자로서 우리는 종종 필요 이상으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 때가 있다. 전도를 마치 당신 안에 숨겨진 놀라운 전도자를 끄집어내는 어떤 강좌나 세미나가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가? 전도를 꼭 배워야 하는 어떤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염려될 때가 있다. 물론 전도라는 용어 자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라고 말씀하심으로 전도가 무엇인지 매우 명확하고 단순하게 알려주신다. 간단한 이야기다. 당신 마음 속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면,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말을 통해서 밖으로 넘쳐난다는 것이다. 전도가 단숨에 이뤄진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순진한 사람들은 아니다.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일에는 복음을 나누고 초대하고 기도하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의 씨를 뿌리고 또 심는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더하게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라게 하는 것은 그분의 일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직접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마 16:18). 그러나 요즘과 같은 코로나 시대에 나는 교회가 어떻게 해야 세상을 향해 손을 뻗을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우리를 두셨고, 또한 우리가 직면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신다. 당신이 나와 비슷하다면, 복음에 대해 말할 정도로까지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매우 수줍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 들어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복음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질문을 찾았고, 그것을 오늘 당신과 나누고 싶다.
“오늘 우리집에서 저녁 같이 하실래요?”
물론 이것은 기독교적 질문은 아니다. 음식 산업은 거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만찬에 열광한다. 어느 서점에나 어마어마한 요리책이 쌓여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환대에 대해 말하는 우리의 핵심이 음식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과 가정을 오픈하겠다는 것이다. 성경적 환대의 개념은 “손님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가?”를 찾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갖겠습니까?”이다.
여러분 중 일부는 훌륭한 요리사겠지만, 나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잘 대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주일에 교인들이 서로의 집에 방문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격려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환대를 불신자들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다. 식사 초대는 비기독교인에게 다가가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식사 초대를 고려할 때 평소에 기도하던 사람 중 떠오르는 이가 있는가? 초대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아침 식사, 점심 식사, 테이크아웃, 또는 각자 집에서 음식을 갖고 오는 포틀럭 식사 등 선택지는 많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뤄지지 않을까 걱정된다면, 수다스러운 기독교 친구도 같이 초대하라.
런던과 같은 외로운 도시에서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고 환영하는 것은 반문화적이지만, 집과 마음을 공개함으로써 결국에는 좋은 전도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교회에 가 볼래요?”
이것은 은근히 큰 두려움을 야기하는 질문이다. “저 사람은 절대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을 거야.” 또는 “저 사람이 교회에서 하는 말을 이해할 리가 없지.” 등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훨씬 더 우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다양한 상황이 주는 많은 도전으로 인해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한 그 약속을 믿는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하며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이 제자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한다(엡 2:22). 따라서 우리가 사람들을 교회에 초대할 때 그것은 사실상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여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내 힘으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교회에서 친절과 사랑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환영하고 불신자를 데려온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갖고, 행여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 백성이 갖는 교제의 매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성경 한번 읽어보실래요?”
이 마지막 질문은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생소하게 여기지만 사실상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읽지도 않고 성경을 무시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결코 성경을 무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성경이 자신의 삶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신자라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외부인이라면 교회의 그 어떤 일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눈은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앉아서 질문과 의견을 듣고, 그들이 생명의 말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방법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
최근에 누군가가 ‘성경 공부’라는 이름을 붙이는 대신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북클럽으로 성경 읽기 모임을 만들라는 조언을 했다.
우리에게는 질문과 답변이 있는 성경 공부가 익숙하지만, 비기독교인에게 그런 형태는 매우 낯선 것이다. 복음서 한 장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게 좋다. “느낌이 어때요?”,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나요?”,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지금 읽은 내용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주는 게 무엇인 것 같습니까?”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때 대화가 얼마나 물 흐르듯 흘러가는지, 당신은 크게 놀랄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마가복음을 함께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읽는 시간이 15분에서 20분을 넘어가면 힘들어진다. 또 나는 나 자신에게 설교를 그만두라고 수시로 암시를 해야 하지만, 당신에겐 해당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본문 설명이 독백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질문을 받고 “나도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경 공부 인도에 관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경험 많은 교회 지도자에게 가이드를 받도록 하라.
지금까지 내가 말한 내용 때문에 당신이 부담 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질문은 내게 있어서 친구와 이웃에 대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무엇보다 내 속에서 기도하고 싶은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생활에는 여러 계절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상한 계절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때를 주님께서 우리의 교제를 더 풍성하게 하시고 새 생명을 가져오는 시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