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성장에 관한 글 (스커트 허바드) 나눕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위험으로 덮여있는데, 문제는 그 위험이 항상 우리가 예상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하면서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예상한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쾌락, 세상이 속삭이는 거짓 이야기와 엉터리 도덕. 우리는 또한 고난이 주는 위험도 예상한다. 갑작스런 이별, 부서진 꿈, 여러 형태로 오는 핍박. 그런데 세상이 주는 위협과 다를 바 없이 위험하지만 익숙하지 않기에 방심하는, 또 다른 형태의 위협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바로 느려터지기 이를 데 없는 우리의 성화 과정(the slowness of our sanctification)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숫자 상 정확한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준비가 된 이들이 적지 않은데요. 무슨 육체적인 고통이 닥치거나 삶에서 무슨 아픔을 겪어서 그렇게 된 사람들보다는 성화의 과정이 너무도 더디게 진행되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더 많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냥 지쳐버린 겁니다.”
우리들 중 천국으로 가는 길에서 벗어나려는 일부는 세상이 주는 유혹 때문도, 고난에 지쳤기 때문도 아니라, 단지 지쳐서 그렇다는 것이다. 매일 매일 속 자기 부인(self-denial)에 지쳤기 때문이다.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가 한 걸음 뒷걸음치는 것에 지쳤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도성을 향해서, 끝이 나지 않을 거 같은 이 길을 걷는 데에 지쳤기 때문이다.
환상은 깨어지고 지쳐서 그 길에 주저앉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한다.
천만 번 단계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왜 이런 성화의 느린 과정이 놀라움으로 다가올까? 단숨에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처에서 온 것이다. 어쩌면 너무도 빠르게 돌아가는 지금 이 세상이 우리의 기대 수준을 비현실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의 자존심이 오래 전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의 인내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어쩌면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열 번에서 아홉 번은 우리가 만나는 복잡한 갈등 상황을 너무도 단순화시키기 마련인, 모든 죄를 이기는 “비밀” 또는 “비결”과 같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제자도의 길이 빠르게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었던지 간에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함은 결코 한 달, 일 년, 또는 십 년 아니, 평생을 살아도 완성되지 않는 것을 본다. 거룩함에 이르는 길은 결코 열 단계 정도의 계획이 아니다. 천만 번의 단계가 필요한, 우리가 죽어야 비로소 끝이 나는 과정이다.
길게 볼 것
하나님이 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성장의 그림은 성화에 대해서 길게 보는 것이다. 우리의 기대를 빠름에서 느림으로, 즉각적인 것에서 점진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씨를 뿌리는 농부이다(갈 6:7).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서 자라는 것처럼 천천히 은혜는 우리 속에서 자란다. 씨앗은 천천히 하늘을 향해서 발아하고, 작물은 천천히 들판을 채운다(막 4:28). 우리는 경작하고 씨를 뿌린다. 물을 주고 돌보면서 오로지 “인내로”(눅 8:15) 결실을 거둔다.
우리는 자라나는 아이들과 같다(엡 4:14-15). 아이들처럼 우리의 뼈는 천천히 자란다. 나이 많은 형처럼 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유를 마시다가 서서히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벧전 2:2; 롬 8:29). 그러다보면 언젠가 우리는 완전히 장성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가 나타나시면…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가 이뤄질 때이다.
우리는 달리기 경주자이다(고전 9:24). 그 달리기는 단거리가 아니다. 심지어 마라톤도 아닌, 평생 달리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딤후 4:7). 그때까지 우리는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히 12:1)를 해야 한다. 처음 백 미터에 힘을 다 빼면 안 된다. 페이스를 조절하면서 끝까지 달려야 한다.
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만나는 여행자이다(벧후 1:19). 빛은 중간중간 우리의 어둠을 몰아낸다. 가끔 그늘이 지지만 우리의 길은 다음과 같다.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전 4:18).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 위로 솟아오른다. 그 결과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농부, 어린아이, 경주자, 그리고 여행자이다. 이런 각각의 이미지는 심오하고 본질을 관통하는 성화가 평생에 걸쳐서 이뤄지는 과정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천히 나 자신에 대한 또 이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바꾼다.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일에서 조차 예수님은 아주 천천히 당신의 주되심을 이뤄가신다. 내 삶 어떤 영역에서 성령님은 아주 천천히 순종이 습관이 되도록 만들어가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지만 결코 단숨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지 “날로”(고후 4:16) 이뤄가신다.
영적인 현실주의
바로 이 지점에서 두 가지 확실하게 할 점이 있다.
첫 번째로 성화 과정의 모든 것이 다 천천히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어떤 특정한 죄에 있어서, 그 죄가 우리를 노예로 만들 정도로 강력했는데도 그냥 단 하룻밤에 그 죄를 극복했다는 간증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화를 긴 시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하는 기도를 쉬지 않게 된다.
두 번째로, 영적 나태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화에 관한 긴 시각을 악용한다면, 그건 저주받을 일이다. “느리지만 쉬지 말고”는 모든 보통 기독교인이 꼭 명심해야 하는 말이다. “내일, 내일” 하고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좋아서 받으면서 하나님의 경고는 무시하는 한 내일은 언제나 오늘과 똑같다.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는” 게으른 자는 “거둘 때에는 구걸할지라도 얻지 못하리라”(전 20:4). 죄에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은 결코 심판 날 피난처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성경은 성화에 관해서 긴 시각을 제공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짜 중요한 기도를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영적으로 적당주의(spiritually complacent)에 빠지게 하려는 것도 아니다. 대신 우리가 영적인 현실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영적 현실주의자는 한편으로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더 노력한다. 그러나 영적 현실주의자는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피가 주는 성결의 능력이 없이는 결코 하루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시온 산으로 가는 길을 계속 걷는 한, 회개는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습관이 되어야 한다. 우리 속에 사라지지 않는 죄가 있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는 가장 필요한 기도이다(마 6:12). 우리가 몸을 가지고 사는 한 우리는 존 뉴톤(John Newton)이 했던 말을 조금 바꿔서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지금의 나는 되어야 할 나도 아니고, 되고 싶은 나도 아니고 또 다른 세상에서 만나고 싶은 나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John Newton, Christian Life, 268)
매일매일 조금씩
성화에 관한 긴 시각은 제대로만 이해하면 오늘 하루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꿔준다.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이룰 수 있는 성화에 대해서 겸손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농부는 토지를 경작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확을 거둘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광야를 지나는 여행자가 하룻밤에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도 기대하지 않는다. 계절을 지나면서 느끼는 변화와 농지의 광활함은 농부가 허황된 기대를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을 찾는 기독교인도 오늘 하루 동안 원하는 만큼의 열매를 즉각적으로 맺지 못했다고 지나치게 낙담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또 교제하는 것은 레버를 비트는 일이 아닌, 씨앗을 뿌리는 일에 더 가깝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나서야 비로서 수확에 대한 기대를 품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성화에 관한 긴 시각은 오늘 하루 내가 하는 작은 순종이 궁극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오늘 하루 내가 내딛는 발걸음이 단숨에 나를 영광으로 데리고 가지 못한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하루 작은 발걸음을 떼지 않는 한 결코 영광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호라티우스 보나(Horatius Bonar)가 말했던 “매일 매일 조금씩”(daily littles)을 이뤄가야 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기독교인의 삶은 위대하다. 이 땅 위에 있는 가장 위대한 것들 중 하나이다. 매일 매일 조금씩, 그것은 그 자체로도 여전히 작은 것이 아니지만 그때까지 진정으로 살아왔다면…. 그 살았던 삶 내내 고귀한 것이기도 하다”(God’s Way of Holiness, 127). 끝까지 인내한다면, 우리는 바로 이런 두 가지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는 기독교인의 삶은 “위대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인의 삶은 “매일 매일 조금씩” 이뤄진다는 시각이다. 거룩은 한 번에 하나씩 이뤄진다.
당신 앞에 놓인 오늘 하루 동안의 순종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순종한다면,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순종한다면,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는다. 오늘 하루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오늘 하루 죄를 고백하고 또 회개하고, 오늘 하루 봉사하고 전도를 하는 일이 다 당신 영혼의 토양에 스며들 것이다. 당신은 오늘 미래의 당신을 만들어낼 씨앗을 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