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관한 글 (제레드 윌슨) 나눕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 스스로가 그 사실을 말했다(마 12:30). 따라서 예수님이 유대 땅을 다니면서 전파하고 가르치고 또 사역을 행할 때 그를 만난 사람들 사이에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찬 경외감으로 그를 대했지만, 또 어떤 이들은 불타는 증오로 그를 맞았다. 현대 사상가들이 흔히 생각하듯 예수님이 그냥 듣기 좋은 가르침을 전했던 선한 도덕 선생이었다면 이런 양극화된 반응이 일어났을 리 없다. 아니,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안전한 가르침을 준 선생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공간의 연속선상에서 영적 붕괴를 일으키신 분이셨다.

그가 지상에서 사역하는 동안에도 그리스도 자신과 그가 가르치는 교회에 관한 진리는 끊임없이 퍼져나갔고, 또 동시에 거부되었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더 관심을 갖는 분야는 바로 거부이다. 그들 중 일부는 기독교 믿음이 가진 거칠고 강경한 부분을 부드럽게 고치면서까지, 듣는 사람들의 귀에 복음을 매력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게 예수님의 복음을 변질시킴으로써 듣는 이들이 행여 예수님을 향해 가질지 모르는 반감을 줄이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열정마저 사라지게 하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현대 복음주의가 전파하는 안전한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동시에 그들을 압도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니, 우리는 진짜 예수님을 찾아야 한다. 진짜 그가 어떤 분이었고 또 지금은 누구이며 그가 지신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 영혼을 보호하는 십자가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진짜 예수님을 전할 때 그로 인해 적개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분명히 생기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해 진정 뜨거운 애정이 일어나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게 된다. 바로 그런 현상을 예수님 자신이 설명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다.(요 10:24-30).

여기에는 우리가 영적 비행을 할 때 놀라운 역할을 하는 기막힌 사실이 숨어있다. 예수님의 말은 이것이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그들에게 진리를 말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듣는 귀’를 갖고 있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에 중간지대란 있을 수 없다. 당신은 예수님께 속하거나 아니면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진 압도적인 측면이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없이 복음의 메시지에 반드시 반응한다. 그리고 조금 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그를 죽이려고 한다.

명확하게 경계선을 그을 때는 반응이 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반응은 항상 긍정적이지는 않다. 어떤 이들은 당신이 정한 경계선을 보면서 거부할 것이고, 또 어떤 때는 적대감마저 가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거기에 의지하기도 한다. 배타적인 기독교를 향해서 사람들이 결코 취할 수 없는 태도가 하나 있다면, 그것은 100% 애매한 것, 중간지대에 머무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결코 그럴 수 없도록 강요한다.

나는 이런 사실이야말로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난, 그 조용한 대부흥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지역은 지금 미국에서 가장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적은 곳이고, 포용주의와 똘레랑스(관용)를 중시하는 사람들로 가득찬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 이후로 보스톤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지만 도리어 그 도시 안의 교회 숫자는 두 배가 되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숫자는 그 기간 중에 무려 세 배 이상 늘었다.

뉴잉글랜드 전역에 걸쳐서 보수적인 교회는 조금씩이나마 늘고 있지만, 다른 교회들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자유주의 신학이 주류인 교회와 이단성을 가진 공동체주의 교회일수록 ‘안전한 예수’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런 현실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복음주의 커뮤니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압도적인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더 끌리고 있다.

어떻게 보수적인 신학을 가진 복음주의 교회들이 설교하는 이 오래된 이야기가 동북부 지역의 딱딱한 토양에서 사는 사람들을 믿음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일까? 직관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확실하게 경계를 정할수록 사람들은 더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복음이 특별히 더 압도적인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안정감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다른 종교 또는 철학과 달리 기독교는 인간의 의지 또는 인간의 지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대신 기독교는 하나님의 의지와 속죄가 가진 확실성을 제공한다. 기독교의 배타적인 복음이 제공하는 안정감은 다른 종교가 제공하는 안정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른 종교는 이렇게 말한다. “이 정도의 높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너는 구원받은 거야.”

이런 말을 하는 종교가 겉으로 보기에는 안전한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너무도 많은 변수가 숨어있다. 다른 모든 종교는 끊임없이 뛰어야 하는 러닝머신이다. 그러나 ‘구원받기 위해서’ 얼마나 더 달려야 할지, 얼마나 더 선해야 할지 당신은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룬 일 때문에 다음과 같이 약속할 수 있는 안정감을 제공한다. “네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이 너를 덜 사랑하도록 할 수는 없어.”

나는 워싱톤 D.C.에서 바로 이런 복음을 무슬림 택시 운전사와 나눈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운전사가 한 말이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명목상의 이슬람 교도였다. 이슬람식으로 말하면,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 용서에 대해서 뭘 믿느냐고 물었고, 이 세상에는 알라조차도 용서할 수 없는 나쁜 죄가 있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슬람 테러리즘이 가진 문제라고 말했다. 알라도 테러리즘은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너무 끔찍한 말이었다. 죄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하는 그 사람을 나는 높이 평가했다. 살인은 정말로 끔찍한, 하나님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죄악이다. 게다가 집단 살인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나는 그가 죄의 심각성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깊이도 함께 보기를 바랬다.

그는 살인을 향해 눈을 감는 하나님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살인을 향해 눈을 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모든 살인을 벌한다. 하나님은 모든 죄악을 벌한다. 단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가 받아야 할 모든 벌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대신 짊어졌을 뿐이다.

이런 종류의 배타적 구원의 은혜는 오로지 기독교에만 있고, 오로지 그리스도를 믿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다른 종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안정감을 제공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피난처를, 다른 곳이 아닌 바로 하나님 안에서 찾도록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그 분보다 더 안전한 곳은 이 세상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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