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시작에 관한 귀한 글 나눕니다.
주기도문은 첫 문장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주의를 기울이면 오히려 길을 잃어버리는, 재미있는 상황 중 하나가 주기도문이다. 우리라고? 왜 복수형이지? “우리”에는 도대체 누가 포함되지? 지금 상황은 “1단계: 위에서 말한 재료를 섞을 것”이라는 지침으로 시작하는 사용 안내서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 한 단계를 놓쳤다고 가정하자. 그럼 이제 잃어버린 첫 페이지를 찾기 위해 마구 뒤섞인 서류 더미를 잘 찾아야 한다.
우리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다음 두 진영으로 나뉜다. 주님을 “나의 하나님”(My God)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존경심을 담아 적당하게 거리를 두면서 “경외하옵는 하나님”(Mr. God, sir.)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말이다.
두 가지 접근법
“나의 하나님” 그룹은 기도하는 걸 좋아한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다른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한 내용을 다 알아들은 당신을 향해 몰래 윙크를 보내주는 다정한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 같은 존재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좋은 점이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다. 당신을 위해 하나님이 항상 대기하고(available) 있고, 언제나 곁에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사랑한다. 당신은 또한 스스로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느끼며, “나의 하나님”이 흘러나오면 자연스럽게 “아버지”라는 단어가 따라나온다.
“경외하옵는 하나님” 그룹은 기도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목사가 대신 기도하는 게 훨씬 편하다. 이런 사람들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무섭고 끔찍한 타자성(otherness)을 가진 존재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초월한 존재이기에 결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순한 골든 리트리버가 아니며, 당신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안다. 하나님은 오히려 훈련되지 않는 클라이드데일(Clydesdale) 말과 더 비슷하다. 그 말이 뛰고 있는 공간에 발을 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발굽에 두개골이 박살이 날 수도 있다. 성경의 비유를 들자면, 하나님은 사자이고 기도하는 것은 그 사자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런 위험한 작업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다.
당신이 이런 두 유형에 속한다면 “우리”라는 작은 단어 때문에 넘어질 수도 있다. “우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도 아니고 또 다른 사람의 하나님도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적인 존재도 아니고 빌릴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단지 공유될 뿐이다. 복수형 “우리”는 기도가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일대일 대화가 아님을 즉시 보여준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글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논리적 대답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우리”에 포함된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 1:12).
성공회 교리서(Anglican Catechism)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설명한다.
문: 예수님은 왜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가?
답: 예수님은 나 자신을 개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가족의 일원으로 이해하라고 하신다. 따라서 그에 걸맞게 기도하라고 일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라는 말은 우리를 가족의 일원으로 만든다. 별로 어렵지 않다.
우리는 다 가족이다…. 이제 설명이 다 된 거지?
아니, 아직은 아닌 거 같다.
“우리”라는 단어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잠깐 속도를 늦추고 우리에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 오히려 역겹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기도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 “우리”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불편하다. 그로초 막스(Groucho Marx)가 “나는 나를 회원으로 받아주는 어떤 클럽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 아마도 그가 염두에 둔 곳은 교회였을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다지 덕(virtue)이 넘친다고 알려져 있지 않은, 제멋대로인 무리이다. 하나님은 “거역하는 자식들아, 너희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 너희가 계획을 추진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동맹을 맺지만, 나의 뜻을 따라 한 것이 아니다”(사 30:1)라고 선언하신다.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라는 단어를 들은 제자들은 분명히 움찔했을 것이다. 거기에 그럼 탕자 형제도 포함된다는 건가? 세리와 매춘부는? 바리새인과 로마 군인도? 부자 청년과 가난한 과부까지?
오늘날 문화 속에서 여기에 포함할 수 있는 개탄스러운 사람들의 목록은 뭐가 있을까?
• 다른 교단과 부류의 그리스도인?
• 정치적 진보와 보수?
• 활동가와 평화주의자?
• 도시인과 시골 사람들?
• 밀레니얼 세대와 베이비부머 세대?
의심할 여지 없이, 누구나 “우리”에 포함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라는 이 말은 본질상 공격적이다. 왜냐하면 내가 평생 구분되고 싶어서 발버둥질한 대상과 나를 같은 범주 안에 넣어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투자한 모든 시간과 돈과 에너지와 관계없이, “우리”는 나를 그냥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 모두와 한 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어떻게든 교회에 나오게 된 그들을 위해서(for) 기도하는 건 나쁘지 않다. 그런데 내가 그들과 함께(with) 기도해야 하나? 내가 그들과 동일시되어야 하나?
주 예수님의 대답은 조용하고 따뜻하며 단순한 “그렇다”이다. 처음에는 실망스럽게 느끼겠지만, 그 안에는 실로 놀라운 특권이 담겨 있다.
가족의 유대
예수님도 “우리”의 일부이다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사생아 무리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큰형이 되시는 그리스도와의 형제 관계에 들어간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당신과 나를 초대한다. 내가 함께 기도하는 대상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그분의 백성, 심지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나는 얼마든지 함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회중이 공동 예배에서 함께 주기도문을 하는 게 중요하다. 주기도문은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일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단지 주기도문을 같이 한다고 이질적인 그룹을 지속하여 함께 유지하지는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입에서 나오는 급진적인 단어 “우리”를 제대로 이해만 한다면, 우리는 최소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매주 상기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다른 죄인들과 한 가족이라는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 단지 나 혼자만 예수님에게 나아갈 수는 없다는, 예수님이 만드신 주기도문의 원칙 말이다.
예수님은 가장 좋은 기도 방법 또 세상에서 올바른 영적인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바른 기도에 목마르고 갈급한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 속에서 예수님은 경쟁적이고 또 남을 판단하기에 바쁜 죄성을 보았다. 바로 그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 속에서도 똑같은 죄성을 본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화를 내거나 한숨 쉬지 않는다. 오히려 참을성 있는 부모처럼 이렇게 다독거린다. “자, 다시 한번 더 해보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할지에 관한 나의 생각을 전복시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상세한 목록을 주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자신을 따라서 “우리”라는 단어를 말하라고 가르칠 뿐이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도 “우리”라는 단어를 말할 때, 나를 포함할지를 놓고 고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라고 여지를 남겨둘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