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긍휼을 배우게 하는 귀한 글 (존 블룸) 나눕니다. 

 

열한 명의 제자가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지상명령을 받은 순간에도, 마태는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마 28:17)라고 전한다. 몇몇 제자들이 이 놀라운 광경을 의심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놀랍지만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의심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형제자매들이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심”으로 번역한 그리스어(디스타조)는 흔들리며 주저하는 불확실성, 즉 일반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몇몇 제자들을 흔들리게 했는가? 마태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주의 자비라고 생각한다. 의심하는 사람의 의심하는 내용은 그들의 경험과 기질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만난 낯선 만남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경험한 일과는 전혀 달랐다. 기존의 모든 개념과 충돌하는 초현실적인 경험이었을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이상할 것이다.

의심하는 제자들

학자들 사이에서 열한 명의 제자가 의심했는지 아니면 제자들과 동반한 사람 중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성경 본문은 열한 명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의심은 부활하신 그날과 그날 이후에도 열한 명의 제자들과 더 많은 사람 사이에 존재했다.

우리는 도마가 예수님을 직접 보기 전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다(요 20:25-29). 열한 명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들이 목격한 것을 믿기 어려워한 사실을 알고 있다(눅 24:36-43). 우리는 또한 더 많은 제자가 그들이 들은 부활의 소식을 의심했던 것을 알고 있다(눅 24:13-34).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은 예수님 제자들의 몇몇은 직접 보고 들은 놀라운 것들을 의심했다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군가가 본 것과 들은 것, 경험한 것이 모두 사실일까 하고 의심하는 것, 흔들리고 주저하는 불확실성을 경험하는 것은 놀라울 만큼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의 형제, 유다가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라고 쓴 것에 매우 감사한다

유다의 자비

짧은 유다서는 주로 거짓 선생에 대한 냉철한 경고이다. 요한의 편지나 베드로의 두 번째 편지와 히브리서처럼 유다는 우리가 왜곡된 복음과 복음으로부터 떠나는 것의 심각성을 느끼고 신실함으로 인내하기를 바랐다.

맺음말에서 그는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라고 말한다. 유다는 의심이라는 말을 그리스 단어(디이아 크리노)를 사용하는데, 이는 흔들리는 불확실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사전에서는 “자신과 대립한다”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경쟁적으로 진리를 주장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에게 자비심을 가져라. 그들을 짓밟거나 비난하지 말고 도우라고 말한다.

유다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는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의 주장을 의심했을 때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예수가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자비를 베푸신 예가 많이 있다.

예수님의 다양한 자비

신약성서에서는 의심에 대해 여러 가지 다른 그리스 단어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모든 의심이 같지 않고, 모든 의심하는 자들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자들을 향한 자비 또한 항상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 인내심과 동정 어린 이해와 격려가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권면하거나 심지어 질책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심하는 자들에 대해 예수님의 다양한 반응을 살펴볼 수 있다.

세례 요한

마태복음 11장 2-6절에서 우리는 의심하는 자인 세례 요한에게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태중에 있는(눅 1:41) 요한에게 특별한 계시로(요 1:29-34)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셨다. 헤롯의 감옥에 갇혀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상당한 영적 억압을 경험했을 요한은 선구자로서 자신의 소명이 맞는지 두 번째로 의심했다. 그래서 그의 제자를 예수께 보내 묻도록 하였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

예수님의 대답은 자비롭고 친절했으며, 그의 마지막 날에 요한의 믿음을 굳건히 하려고 하셨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마 12:20). 그분은 고통과 고립의 어둠 속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의심을 어떻게 부드럽게 다루어야 할지 알고 계신다.

베드로

마태복음 14장 28-33절에서 예수님은 다른 의심을 다른 방법의 자비로 다루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으로, 폭풍우 가운데 물 위를 걷기 위해 배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 가는 도중에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깨달았다. 사람들은 물 위를 걷지 못하는 것 말이다.!

그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에 가라앉았다. 베드로가 소리친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마 14:30). 예수님은 그를 구하시고 꾸짖으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마 14:31). 예수님은 베드로(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말씀을 향한 초점이 세상으로 옮겨지는 것의(그의 두려움에 나타난) 위험을 각인시키고자 하셨다. 집중적이고 끈기 있는 신앙을 요구하는 삶의 폭풍에서 우리를 공격하는 의심을 어떻게 단호히 다룰지 알고 계셨다.

도마

요한복음 20장 24-29절은 예수님이 제자의 의심을 다룬 가장 유명한 장면이다. 도마는 열 명의 제자들이 살아난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라고 하였다(요 20:25). 우리는 도마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도마의 의심은 세례 요한과 베드로와는 다른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것을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도마가 알았던 사람들의 목격자적 진술을 의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비한 마음으로 기다리셨다. 그분은 비참하고, 외롭고, 어쩌면 두려웠을 8일이란 시간 동안 도마를 불신에 있도록 두셨다.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7)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언제 그리고 얼마간 우리를 의심 속에 두신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존재

냉정한 관찰자로서 의심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위의 세 가지 예에서 묘사된 종류를 포함하여 여러 종류의 의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의심에 대한 반응으로 예수님의 자비로운 격려와 자비로운 질책, 그리고 그의 자비로운 침묵을 받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어떤 모양이든 의심을 한다. 이는 당신처럼 나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생각을 하는 동시에, 오류투성이인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불확실성, 오류, 그리고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무엇이 사실이고 아닌지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예민한 양심을 가지고 있기에 내 관점이 정확하고,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곧잘 의심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야고보가 우리에게 경고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익숙하다(야 1:6). 다른 사도들처럼 그의 경고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야고보의 형제 유다가 의심하는 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도록 한 것에 감사한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유 1:22). 그리고 예수님이 의심하는 자들에게 보이셨던 다양한 형태의 자비에 감사한다.

우리의 자비

믿음의 싸움은 힘들다. 어떤 형태건 의심은 힘겨운 싸움의 일부이다. 믿음에 위협적이고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 1:3)가 언제나 공격을 받고 있고, 우리를 겨냥한 “불화살”이 쏟아지고(옙 6:16) 있다. 믿는 자들은 오직 “희미하게 거울로 보고” “부분적으로” 아는 시대에 의심은 믿는 자들이 바른 방향을 설정하도록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 거울은 정말로 흐릿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자. 그들을 짓뭉개거나 비난하지 말자. 다른 의심에 대해 다양한 자비의 방식을(짓누르거나 비난하지 않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우자. 그리고 조심스럽게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를 지키는” 이곳을 디뎌보자(유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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