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관한 글 (어윈 인스) 나눕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정말 좋은 백인 친구가 ‘옷 하나 줄게’라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난 ‘그거 좋지’라고 대답했지요. 그는 낡은 티셔츠가 잔뜩 든 가방을 가지고 왔는데, 나는 그 친구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옷을 입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뭔가 주고 싶을 때는 다 쓰고 버릴 것을 주지 말고, 너한테도 소중한 것을 줘야해.’ 그 백인 친구는 낡은 티셔츠를 내게 줌으로 내 가치를 평가 절하했습니다. 그 친구 눈에는 아마도 내가 10달러짜리 셔츠도 살 형편이 못 되는 것으로 보였나봐요.”
패트릭의 친구는 패트릭에 대해서 아프리카 이민자라는 생각과 함께 어떤 암묵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패트릭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패트릭의 마음속에서 성령님이 일하신 분명한 증거는 그가 백인 친구에게 화를 내거나 왜 나를 모욕하느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 교회는 환대를 베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환영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교회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교회라면 예외없이 사람들을 환영하고 포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교회를 향한 이러한 요구는 매우 일반적이며 지역 사회를 더 잘 받아들이기 위한 책임은 교회 안에서도 어떤 특정 그룹에게 주어질 수도 있다. 그런 환대는 안내판일 수도 있다. 교회 집사일 수도 있다. 또는 교회가 특정 환영 팀이나 환영 위원회를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마음속에 주신, 친밀한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공동체와 연결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우리는 어디엔가 속하고 싶고 그럼으로 집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교회가 환영하는 장소가 된다는 점에 높은 가치를 두지만, 그럼에도 같은 사람을 더 선호하는 인간의 특성 때문에 교회조차도 우리와 다른 인종, 민족, 사회 경제적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전적으로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1956년 11월 4일 설교에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입니다. 일요일 오전 11시에 교회에서 일어나 ‘그리스도 안에는 동쪽이나 서쪽이 없다’라는 찬양을 부를 때 당신은 가장 비극적인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바로 그 시간이야말로 기독교 국가 미국이 가장 분리되고 찢어져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설교가 있고 무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메시지는 여전히 울림이 크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와 다른 이웃들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환대하는 공동체는 우리와 다른 사람이 함께 있지 않을 때면 스스로 불완전하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와 다른 사람일수록 우리에게 나눠줄 더 귀한 보물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가장자리에 선 사람들’(Edge People)과의 공동체
한 연구에 따르면 종교 단체 내 이직률은 다수 집단보다 소수 집단이 더 높다고 한다.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종교 조직 내에서 인종 통합을 위한 투쟁(Against All Odds : The Struggle for Racial Integrations in Religious Organizations)’라는 책에서 브래드 크리스터슨, 코리 에드워드, 마이클 에머슨(Brad Christerson, Korie Edwards, Michael Emerson)은 그들이 연구한 각 종교 단체의 “가장자리” 구성원과 “핵심” 구성원을 구분했다. 가장자리 구성원은 조직 내에서 비주류에 해당하는 구성원이고, 핵심 구성원은 가장 큰 그룹에 속하는 동시에 가장 큰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으며 조직의 정체성과 사명을 바탕으로 조직 내 가장 중요한 연결점을 공유하는 그룹이다. 가장자리 구성원은 계속해서 떠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핵심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다른 게 아닌 조직 내 친절함과 환대였다.
가장자리 구성원들이 핵심적 소속감을 경험하며 핵심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전에 나는 전국을 다니면서 다양한 교회에서 설교하고 연설하는 특권을 가졌다. 내가 다닌 교회 대부분은, 비록 통계적으로 다양한 인종이 사는 지역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교인은 여전히 백인이었다. 그런 교회에서 강의 또는 설교를 마친 후 그 교회를 다니는 유색 인종 교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나같이 그들은 다수가 백인인 교회라는 환경 속에서 소수 민족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어려움을 토로하곤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들은 해당 교회로의 부름을 확신하고 또 다양성 속에서 추구하는 하나됨이라는 삶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고군분투한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이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치르는 대가가 무엇인가요?”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이 질문을 던질 때면 그들은 교회에서 그 누구도 이런 질문을 던진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교회라면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을 다 환영한다고 믿고 있지만, 소수 민족이 공동체의 일부가 되기 위해 지불하는 고통스런 대가를 인식하지 못하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환대 속에는 핵심 또는 주류 문화에 속하는 회중이 치러야 하는 대가도 포함되어 있다.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믿음 안에서 인내하는 대가를 냉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구원은 무료지만 그렇다고 구원이 값싼 것은 아니다. 환대의 아름다움을 기르는 것은 제자도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하면 다양한 이웃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자아의 죽음이 있어야한다.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결국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하는 좁은 길이다.
서로를 위해서 살기
COVID-19 전염병으로 인해 교회는 이제 잠시 멈추고, 재조정하고, 뉴노멀(new normal)로 회복되는 길을 상상하는 상황을 맞았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다시 모일 때를 위해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을 새롭게 상상하면 어떨까? 너무 좋아하다 보니 이제는 아예 파괴해야 할 우상이 되어버린 것은 혹시 없었는가? 다양한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려 할 때, 우리가 지금도 손에 꼭 쥐고 놓지 못하는 좋아하는 것 중에서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기독교 공동체에서 누리는 자유는 형제자매들을 위해 우리의 삶을 버리는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는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이다. 더불어 쾌락을 향한 무질서한 욕망을 죽이는 자유이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자유는 이웃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진 마음의 소망은 여러분을 북돋으며, 신앙을 키우고,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해지는 것을 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명이다. 서로를 세우고, 서로를 북돋우며, 서로를 기쁘게 하는 일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