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관한 귀한 글 (스카트 허바드) 나눕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 나오는 단어, 프룬(prune) 즉 ‘제거해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의미와 다릅니다.”

목사님은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11절까지를 본문으로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다. 영어 성경으로 번역된 걸 보면 프룬(prune)이라는 단어는 제거해버린다(가치를 친다)는 의미지만, 실제로 역사적인 맥락과 원어의 의미를 보면 다른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게 목사님의 주장이었다. 이백 명 정도가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다.

“프룬의 원래 의미는 높이 올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농부가 땅에 손을 넣어서 밑으로 처진 가지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거하라(abide)라는 말은 우리의 순종과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들어 올리시는가 하는 것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에 의해서 높이 들려있고, 또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긴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달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주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강단에서 내려왔다. 회중은 일어나서 그의 백성을 결코 치지않는 하나님, 그들에게 힘든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하나님, 어떤 경우에라도 그들을 꼭 끌어안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의 찬송을 불렀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방황하게 하는 말씀

나는 위에 소개한 이야기를 가지고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그 목사의 독특한 성경 해석, 그러니까 어떤 객관적인 해석의 관점에서 봐도 너무 환상적인 해석은 인간이 빠지기 쉬운 유혹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 유혹은 나에게도 있다. 나 역시 양날을 가진 진실의 칼 한쪽을 무디게 하고 싶은, 그래서 살이 베여도 너무 깊이 베이지 않도록 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이 목사를 비롯해 적지 않은 목사들이 왜 성경적 권위에서 벗어나서 방황하는지 그 원인을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이야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담겨 있다. 영혼에 붙어있는 작은 의심, 자신감을 흔드는 대화, 진실을 외면하게 하는 관계 등이 그것이다. 대화를 통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방황하는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지, 왜 그런 방황이 발생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볼 수 있다.

경건의 시간을 마칠 때면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위로를 받을 때 보다는 혼란을 느낄 때가 더 많다. 머리를 책상에 부딪히면서 진리를 받아들이려고 발버둥 쳤다. 의심이 내 팔꿈치를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이 느낀 적도 있다. “너 정말로 이걸 믿는 거야?”

그러나 나는 성경으로부터 받는 이런 경험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도 배웠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백성을 위로하고 존귀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불편하게 하는 말씀

아브라함은 그가 약속으로 받은 아들 이삭과 함께 앉아있었다. 이제는 모든 시험이 끝났고 오랜 기다림의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그는 상상도 못 했던 명령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아내와 자녀를 거느린 목자 모세는 양을 끌고 호렙산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불꽃에서 나오는,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북쪽 왕국에서 살고 있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그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명령을 받았다.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호 1:2).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언이 주는 경외감 속에서 아이를 성전으로 데리고 갔다. 거기서 그녀는 날카로운 칼날과 같은 예언을 들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눅 2:34-35).

예수님의 사역까지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그의 말씀이 많은 경우에 상처받은 갈대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동시에 그의 제자들을 꾸짖었다(마 16:23). 또 그의 이웃을 공격했고(막 6:2-3), 서기관을 부끄럽게 했으며(마 22:46) 그 결과 그의 적들이 그를 죽이려고 돌을 들도록 만들었다(요 10:31).

만약에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성경의 모든 구절을 다 제거해버린다면 아마도 성경의 요약본도 채 안 되는 구절만을 손에 들고 있을 것이다.

우상과 관습 파괴자

왜 굳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는가? 왜 스캔달을 일으키고 공격을 하는가? 하나님은 단지 깃털을 흔드는 정도로 기뻐하지 않는다. 현실은 항상 우리가 가진 망상을 사라지게 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죄는 우리 모두를 어느 정도는 망상에 빠져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현실 속에서 끄집어내어 버리고 그 자리에 다른 하나님을 그려 넣으려고 한다(롬 1:18-21).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우리는 진리를 반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절규한다. “어리석은 소리야!” 우리는 또 외친다. “이 말씀은 너무 공격적이야!” 그리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진리를 예루살렘 외곽에 있는 언덕으로 끌고 가서 나무에 매달고 싶어한다(고전 1:23; 2:8). 우리는 말씀으로 불편해져야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적을 불편하게 만들죠. 그러나 아브라함, 모세, 호세아 그리고 마리아는 하나님의 친구잖아요? 왜 그런 사람도 말씀으로 불편하게 하는 거죠?”

우리를 구원하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종종, 그리고 반복해서 우리를 현실 속으로 되돌려 놓을 필요가 있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신령하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때그때 부서진다. 하나님 자신이 그런 생각을 부순다. 그는 위대한 우상 또는 관습 파괴자이다. 이런 부서뜨림이야말로 그의 실재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시 또는 증거가 아닌가?”(헤아려 본 슬픔, A Grief Observed, 66)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와 정면으로 부딪친다. 우리를 회복시키지만 꾸짖는다. 구원하지만 부순다. 그분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기 전까지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간절히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에게 갈 것인가?

그럼 불편하게 하는 말씀을 앞에 놓고 앉아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두 가지를 만날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이 주신 가장 불편하게 하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우리는 군중들처럼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요 6:60). 그리고 또 누군가는 이런 말을 했다. “설마 나의 하나님이 그런 일을…” 그러나 그런 경우도 “나의 하나님(my God)”은 그냥 “나의 신(my god)”, 우리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작은 나무 조각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예의 바르고, 오래 참고 그리고 안전한 신.

아니면 우리는 베드로와 같은 입장일지도 모르겠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가 지금 꼭 예수님이 말한 모든 말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 마음에 안정된 평안만을 가져야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단지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만 알면 된다. 그리고 바로 예수님이 구약 성경의 점 하나까지도 다 지키기 때문에(요 10:35) 또 신약 성경의 모든 말씀도 지키기 때문에(요 14:26) 우리는 성경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같은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불편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지만 중풍병자를 일으키고, 어린아이를 반기고 과부를 격려하며 버려진 자를 찾는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믿을 수 있는가? 범죄자 사이에서 면류관을 쓰고는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정복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죽음을 짓밟고 영광중에 다스리며 또 이 세상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그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불편하게 하는 그분의 말씀에서 도망쳐 보다 더 평안을 주고 확신을 주는 말씀으로 달려갈 수 있다. 아니면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로지 당신만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갖고 있습니다.”

와서 불편함을 느끼라

데이비드 깁슨(David Gibson)은 이렇게 썼다. “때때로 당신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이 울도록 하신다는 것을 알 때, 그제야 당신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기대를 뒤집어라. 당신의 우선순위를 뒤바꾸라. 당신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라”(’삶을 거꾸로 살기’[Living Life Backward]).

유한하고 미력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지혜를 하나님의 무한하고 실패하지 않는 지혜 앞에 내세우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런 과정은 뼈를 다시 맞추는 것처럼 아플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처가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은 우리를 다시 치료하기 위해서이다(호 6:1). 우리에게 불편한 말씀을 주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이제 성경을 읽을 때면 하나님이 스스로 하시겠다고 한 일을 하실 것을 기대하라. 당신을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훈련하신다(딤후 3:16). 꼭 그렇게 해달라고 용기있는 기도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어떤 우상이든지 부셔주시옵소서. 어떤 거짓이든지 부셔주시옵소서. 나를 불편하게 하소서. 나를 다시 만드시고 나를 흔드소서. 그것이 당신께 나아가게 하는 길이라면.”

이런 기도는 아프지만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의 자만심과 자족함, 평안만을 바라는 환상이 다 부서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일까? 자유이다. 영광을 향한 소망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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