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 생활에 도전이 되는 글 (토마스 브루어) 나눕니다.
혼잣말하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 적이 있는가?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고? 내 자신이 노출된 것 같은 느낌은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누군가가 우연히 벌거벗은 나를 본 거 같은 느낌과도 비슷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거의 볼 수 없는 우리의 내적 삶이 갑자기 공개된 것과도 비슷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혼잣말을 하다가 들키는 경우는, 보통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은밀한 곳이라고 확신하던 장소일 때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휴게실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이렇게 중얼거리곤 한다. “아이고, 하루에 커피 두 잔 이상 안 마시겠다고 약속했는데 말이야.”
물론 혼잣말하는 게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혼잣말하는 것을 본다고 그렇게 놀라지도 않는다. 누구나 다 살면서 마음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우니까. 혼잣말은 단지 그런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오늘 하루 중에 몇 번이나 이런 말을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데.” 또는 “가게에 가야 하는데…. 아니야, 그냥 집에 있을래.”
우리는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의 저울질을 한다. 마음속에서 논쟁을 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는 혼자 재미있어 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대화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은 그냥 우리 마음속에서 묻힌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가 스스로에게 하나의 독립된 세상이다.
나는 가끔 사탄을 만난 하와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는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단지 상상만 할 뿐이다. 물론 하와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이런 구절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녀가 사탄의 말을 듣고 생각했을 구체적인 내밀한 마음속 대화를 알 길은 없다. 하와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 과일 정말로 맛있어 보이네.”, “저건 나를 지혜롭게 할 것이 확실해.”, “이 사탄의 말을 믿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속았다. 아담과 하와가 한 마음속 대화는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탄에게 귀를 기울였고, 결과적으로나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사탄은 그들의 마음속에 자기기만을 심어 넣었다. 사탄과 대화하던 어느 순간에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법을 배웠다.
자기기만은 자주 접하지 못하는 주제이다. 스탠포드 철학 사전(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 SEP)은 여기에 관해서 이렇게 소개한다.
자기기만은 용어의 정의와 전형적인(paradigmatic) 사례를 포함해 사실상 모든 측면에서 철학자들 간 논쟁의 문제이다. 최소한의 의미만 부여할 경우, 자기기만은 어떤 동기로 인해 압도적인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럼에도 어떤 측면에서는 마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좋은 것만 주었지 나쁜 것은 하나도 주지 않았다. 사탄과 이야기할 때, 그 두 사람은 사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사탄과의 대화를 보면, 그들은 진짜 진리가 뭔지에 관해서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SEP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자기기만이 개인적으로나 또는 집단적으로 자기 지식(self-knowledge)을 얻는 데에 장애물의 역할을 하는 한, 그것은 단지 철학적으로 흥미롭게 다룰 문제 그 이상이 된다. 자기기만은 실존적 우려를 자아내는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 자기기만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또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얼마든지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현저한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얼마든지 스스로에게도 이방인이 될 수 있고, 또한 인간에게 중요한 도덕적 책임(moral engagements)이라는 본질에도 눈을 감고 살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거짓말하는 건 사탄만이 아니다. 우리도 거짓말쟁이다. 남들에게만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이 사실은 SEP가 설명했듯이, 우리가 얼마든지 스스로에 대해서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말로 우리는 잘 속는다. 우리가 실재(reality)라고 생각하는 게 실재가 아닐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연기와 거울로 가득한, 재미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절망감에 빠져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시편 15편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절). 그리고는 대답한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2절). 이 짧은 문답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문제를 다룬다. 누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갈 수 있을까? 아담과 하와 같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는 하나님께 순종했고 그의 마음에 진실만을 말했다. 그건 그 자신이 바로 진리였기 때문이다.
그럼 마음에서 나오는(from hearts) 진리를 말하는 것 뿐 아니라, 마음에서도(in hearts) 진리를 말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진리를 말하는 길을 따라 예수님을 쫓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 가지를 생각해보자.
진리를 알라
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하려면 먼저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알았고 또 공부하면서 자랐다. 공생애 사역 내내 말씀을 인용했고, 희망을 가지고 말씀을 끝까지 의지했다. 우리도 말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에 대해서, 또 가족과 교회 그리고 직장에 관해서도 비관적인 태도를 갖기 쉽다. “나는 결코 바뀔 수가 없어. 하나님이 이렇게 화를 못 참도록 만드셨는데, 뭐.”, “이 직장은 정말로 구제불능이야, 정말로 개판이야.”, “이놈의 교회에는 위선자만 가득 차있네.”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다. 이런 모든 생각들, 우리가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만 품고 있는 모든 생각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먼저 화를 못 참는 성격과 관련해서, 인내는 성령의 열매이고 또 하나님은 우리가 더 거룩해지길 원하신다는 것이 진리이다(갈 5:22; 히 12:10). 나와 별 관계없어 보이는 직장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다 주를 위해서 일하는 존재이기에 어떤 일도 나와 관계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 진리이다(골 3:23-24). 교회 안 위선과 관련해서는, 교회도 죄인이 모이는 곳이지만 교회는 여전히 거룩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자라는 곳이라는 게 진리이다(고전 5:1-2; 엡 4).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 안에서 성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때, 그 진리는 당신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거짓말을 물리치는 항생제가 될 것이다.
진리를 믿으라
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믿는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거짓말이 들릴 때, 그래서 그 거짓말을 믿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능동적으로 거짓말을 버리고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공생애를 앞둔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거짓말을 앞에 놓고 반복해서 진리를 택하고 또 택했다(마 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그 말씀을 믿겠다고 선택했다. 내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겠다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는 달리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믿겠다고 선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도 진리를 믿겠다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논쟁이 과열되다 보면 우리는 마음속에서는 내가 지금 상대편에게, 그게 배우자이든 아니면 직장 동료, 친구이든, 죄를 지은 것을 알면서도 내가 지금 확실하게 옳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무엇이 진리인지를 마음속에서 먼저 인정해야 한다. “상대의 동기가 뭔지 내가 미리 어림잡아서 가정하는 죄를 지었어.”, “너무 거칠게 반응하는 죄를 지었어.” 상대에게 정직해지고 치유 과정을 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진리를 행하라
마음속에 있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믿는 그 진리가 말과 삶으로 드러날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마음에 죄가 없었기에 아예 죄 자체가 없는 분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진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났다. 야고보가 진리를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라(약 1:22-25)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진리를 행하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4장 32절은 이렇게 말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간단한 권고의 말씀은 한 가지 진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에서 그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거짓말을 믿게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도저히 희망이 없는 위선자가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거짓말을 믿게 되면, 우리는 그 거짓말에 근거해서 행동한다. 쉽게 잡담에 휩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 믿음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지금과 같은 세대에서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진리를 믿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의 죄성을 보면서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다 거룩한 나라이며 지금 함께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기만 한다면, 미래를 바라보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벧전 1:5; 계 21). 포기하면 안 된다.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계속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
마음속 거짓말을 멈추고 그 대신 언제나 진리만을 말하게 되는 그날을 소망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속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 무엇이 진리이고 아닌지를 놓고 갈등하지 않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으로도 오로지 진리만을 말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진리만을 말하는 바로 그 예수님처럼, 우리도 변화될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