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4일 토요일

 

신선한 도전이 되는 글 (존 블룸) 소개합니다. 

 

언젠가 A. W. 토저(Tozer)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내용이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이와 상반된 차원에서 C. S. 루이스(Lewis)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가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하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나는 루이스의 말에 동의하지만, 토저의 말에도 간과해서는 안 될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진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우리는 영혼의 은밀한 법칙을 따라 우리 마음으로 생각해 낸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결정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탄과 그에게 속한 악한 영들을 생각할 때는 어떤 내용이 떠오르는가? 물론 그 내용이 우리 자신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사탄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보다 하나님이 사탄에 대해 생각하시는 내용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탄에 대해 생각하는 내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다.

과연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악한 영들의 존재와 활동에 관해 말씀하시는 내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얼마나 진지하게 그 말씀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단지 교리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도 그 말씀을 생각하며 살아가는가? 또 우리 마음은 영적 전쟁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 그러한 마음은 일상생활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우리가 기도하는 방식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나아가 우리가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유혹과 두려움, 가정의 문제와 교회 안에서의 갈등,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 그리고 복음의 열매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나 대외적인 사건 등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는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그러한 문제들에 반응할 때 우리는 어떤 영적 전략을 가지고서 행동하는가?

이러한 물음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탄의 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계책을 알고 있는가

신약 저자들은 자신들이 참여하고 있는 영적 전쟁을 심도 있게 의식하며 본문을 기록했다.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후 2:11).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과 이적을 살펴보면 “마귀와 그 사자들”(마 25:41)의 간섭이 계속해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역을 시작하며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부터 십자가 처형을 둘러싼 온갖 사건에 휘말리시기까지(마 4:1-11; 요 13:27) 사탄과 그 세력은 항상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자 했다. 예수님은 사탄이 어떻게든 그분의 백성을 속박하고(눅 13:16), 종교 지도자들과 기관에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뿐 아니라(요 8:44), 복음의 역사에도 힘을 다해 대적하며 그 결과를 약화시키고 훼손시키려 한다고 가르치셨다(눅 8:12). 또한 사탄이 막대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쳐 ‘그의 나라’를 세우려 한다고도 가르치셨다(눅 11:17-18). 그래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한 제자는 그분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 10:38).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따라 사도들이 불신의 세상 속으로 들어간 목적도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었다(행 26:18).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쟁에서 그리스도인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고 있다(엡 6:12).

그래서 사도들은 반복해서 경고했다. “근신하라 깨어라!” 왜 그러한가?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이다(벧전 5:8).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사탄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번 자문해 봐야 한다. ‘혹시 나는 사탄의 계책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가 진단

여기에 자가 진단을 해 볼 수 있는 질문이 있다. 혹 당신은 이 글의 서두에서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이 악한 영들에 의해 야기되거나 악화될 수 있다고 언급한 내용에 대해 어떤 정서적인 반응을 보였는가? 그러한 말이 현대 문화에는 맞지 않게 여겨져 좀 당혹스러웠는가? 너무 비과학적이고 심지어는 미신적이어서? 또는 그러한 말을 듣고 뭔가 변호하고 싶은 불쾌한 감정이 일어났는가? 특히 정신적 고통의 경우 누구도 함부로 그러한 고통을 마귀의 역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며 항변하고 싶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어떤 결론을 내리기 전에, 당신의 정서적인 반응을 평가해 보는 시간부터 갖도록 하자. 만일 당신이 당혹감을 느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혹 뭔가 항변하려는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면, 그 이유는 또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한 감정은 마귀의 역사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당신 자신의 경험이나 모든 현상에 대해 자연주의적 가정만을 인정하는 현대 문화에 근거해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여기서 우리 자신의 반응에 대해 의문을 품고, 그러한 반응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반응이 우리의 신앙에 자리한 비성경적인 불균형이나 그 안에 감추어진 사각지대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대에는 영적인 사각지대가 있다. 마귀는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 약점을 이용하려 한다. 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순진하게도 우리는 악한 영들이 우리 자신에게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성령의 영감을 받은 신약 저자들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하며 사탄의 계책에 대해 결코 무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다.

물론 육체의 질병과 정신적 고통이 전부 다 악한 영들의 역사로 야기되거나 악화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며, 역사를 통틀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어링갓’(Desiring God; 다양한 기독교 콘텐츠를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미국의 선교 단체 – 편집자 주)에서도 영적 전쟁에 관한 여러 자료들과 더불어 정신적 아픔이나 질병 혹은 장애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취하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다.

초자연주의를 배제하려는 현대 문화

일반적으로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마귀의 역사를 지나치게 의식하며 그러한 관점을 특정 현상에 과도히 적용하려는 문제를 잘 드러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능적이고 비성경적인 자연주의로 인해 그러한 관점을 거의 적용하지 않으려는 문제를 드러낸다. 이러한 문제는 현대 문화의 사각지대에 자리한 그릇된 전제에 어느 정도 기인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는 더 큰 이유는, 이 시대의 문화가 초자연주의를 계속해서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의 초자연적 세계관을 마치 암흑시대의 어리석은 종교적 유물처럼 취급하려는 후기계몽주의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면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혹 마귀의 역사로 누군가가 고통을 겪을 수 있다고 말하면 어리석게 생각할 뿐 아니라 무례한 독설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이미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수치심만 더하는 일로 비쳐진다. 그러한 주장을 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과거의 세계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앞서 언급한 정서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그 충격은 때로 우리의 영적 세계에까지 전달된다. 문제는 둘 중 하나다. 악한 영들이 실재하고 그들의 존재를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부정하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든가 아니면 악한 영들이 실재하지 않은데도 그들의 존재를 들먹이며 어떤 현상을 진단하여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든가이다. 물론 우리 중 누구라도 끔찍한 결과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고통 받는 자를 가해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기를 원한다. 결국에는 둘 중 한 가지 문제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당연히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부정할 때 그러한 결과가 일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견고히 맞서자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 28:19)는 지상명령에 적극적으로 순종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행 26:18) 일을 보고자 한다면, 마귀의 역사를 진지하게 취급하는 우리의 태도를 비웃고 마침내는 불편한 상황까지 야기할 수 있는 현대 문화의 시선을 기꺼이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마귀에 사로잡힌 희생자로 살도록 그들을 비참히 놔두기보다 우리 자신이 어리석게 비쳐지는 일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탄의 세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그에 대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침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악의 현실을 직시하는 성경의 관점과 우리 마음이 더욱 일치할수록, 우리 각자는 더욱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고, 사람들에게 더욱 영적인 도움을 주며, 어둠의 권세에도 더욱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감당하신 치욕을 우리도 짊어질 수 있다(히 13:13).

성경은 초자연적인 세계관을 확고히 제시하는 책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그리고 마귀와 그에게 속한 악한 영들, 이 양자 사이에 벌어지는 영적 전쟁과 각 진영을 대변하는 사람들 간의 다툼이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다음과 같은 삶의 방식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0-13).

우리 모두 이 지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그래서 사람들이 마귀의 계책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저들을 도와주자. 그리고 어떠한 공격에도 견고히 맞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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