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글을 하나 나눕니다. 

 

믿음의 삶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입니다 / 가이 리처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선택한 이름들 가운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택하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창세기 32장에서 이 이름이 주어진 정황은 다른 모든 가능성들 중에서 “그가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의미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창 32:22–32; 호 12:3–4). 하나님이 무한하신 지혜 가운데 자신의 백성들 즉, ‘씨름하는 자들’을 부르기로 선택하신 듯하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시간들 사이에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려해 본다면, 하나님의 진정한 이스라엘로서(롬 2:28–29; 4:11–12; 갈 6:12–16) 크리스천은 원래 야곱에게 주어진 이름의 의미처럼 상속자이며 바로 ‘씨름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시간들 사이를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관점에서 크리스천의 삶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야곱처럼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씨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씨름해야 하며 극복해야한다(호 12:2–6).

하지만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로 물든 세상, 즉 죄인들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죄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은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긴장감 속에 있다. 죄로 인한 아픔, 질병, 기근 그리고 자연재해 등은 ‘아직’ 새롭게 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결과들이다. 무법, 폭력, 테러 그리고 전쟁도 ‘아직’ 새롭게 되지 않았거나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죄인들이 거주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삶의 결과들이다.

시간들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이러한 결과들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씨름은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분의 섭리가 아무리 어둡다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대항하여 다투거나 혹은 그분을 향해 주먹을 휘둘러서도 안된다. 하지만 크리스천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알 수 없는 순간들이 많이 있다. 왜 나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궁금한 순간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이혼의 순간에 크리스천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자녀가 도망가거나, 가정을 등지고 떠나거나, 원치 않는 죽음을 맞이할 때는 어찌해야 할까? 한 번의 사건으로 삶의 가치가 송두리째 상실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범국가적인 자연재해나 전염병이 누군가의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의 기능을 파멸시켜 버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크리스천은 이러한 때에 무엇을 해야만 할 것인가? 우리는 단지 하나님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욥이 씨름했던 것 아닌가? 욥은 하나님이 그의 삶을 섭리하신 그 어둠의 순간들로 고군분투했으며 야곱처럼 그냥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씨름했고 비록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승리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삶의 여정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머리를 덮고 있는 구름이 아무리 어둡더라도, 우리는 욥처럼 전심을 다해 노력해야만 하며 끝나는 날까지 인내해야만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어둠이 물러갈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야곱처럼 고백하며 씨름해야만 한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기 전까지 당신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한다는 의미다. 기쁨없이 모든 것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어둠이 제거될 때까지 고통없이 참아내야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주께서 진정으로 모든 것을 우리의 선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 삶의 여정 가운데 보내주셨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잘 씨름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야만 한다는 의미다. ‘이미’와 ‘그러나 아직’ 사이의 긴장감은 크리스천이 죄인임을 깨닫게 한다. 비록 우리의 현재 모습이 과거의 모습과는 다를지라도, 분명 아직은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는 않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롭게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다. 이것은 크리스천의 삶이 필수적으로 자신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임을 의미한다(롬 7:15–25). 크리스천은 반드시 죄를 억누르며 거룩과 의로움을 추구하도록 노력해야만 하되 이를 성령의 능력으로 감당해야 한다(롬 8:12–14; 빌 2:12–13). 우리는 바울이 말한 것처럼 힘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힘써 행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죄와 악한 영들을 대항하며 하나님과 함께 씨름해야만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생이 끝나는 날과 그림자가 물러가는 날까지 인내해야만 한다. 야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밤새 씨름하고 승리해야 한다.

시간들 사이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씨름을 예상해야 한다. 죄인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씨름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과 함께 죄와 악한 영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씨름하는 것은 씨름하지 않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다. 시간들 사이를 살아간다는 말은 우리가 씨름하게 된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리는 잘 싸우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주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까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Similar Posts

  • 8월 9일 주일 (시편 1-5편)

      1.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묵상할 줄 압니다.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어떠한 복이 있나요? 소위 말하는 자식 복, 돈 복, 인(사람) 복… 우리는 종종 복이 없어도 지질이도 없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때론 하기도 합니다. 혹은 ‘운’이라는 말을 언급하기도 하면서 ‘복’과 비슷한 의미로 사용할 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 11월 3일 화요일

    역대하 3장 1-17절   1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2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지 넷째 해 둘째 달 둘째 날 건축을 시작하였더라 3솔로몬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놓은 지대는 이러하니 옛날에 쓰던 자로 길이가 육십 규빗이요 너비가 이십 규빗이며 4그 성전 앞에 있는 낭실의 길이가 성전의 너비와 같이 이십 규빗이요 높이가 백이십 규빗이니 안에는 순금으로…

  • 4월 17일 월요일 (레21 시26,27 전4 딤전6)

    레 21 장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2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3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4 제사장은 그의 백성의 어른인즉 자신을 더럽혀 속되게 하지…

  • 2025년 3월 19일 수요일 / 열왕기하 19장 22절

    3월 19일 수요일 / 열왕기하 19장 21-22절 21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22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비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라는 표현은 종종 하나님의 구별되심을 나타내는 특정한 행위들과 함께 사용됩니다. 거룩함의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됨’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78:41–43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 7월 26일 주일 (에스더 7-10장)

      1.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밀고 온 에스더는 드디어 왕에게 자신과 자신의 민족 유대를 살려 달라고 간청을 하게 됩니다. 결국 하만의 계획은 폭로가 되고 심지어 모르드개의 억울한 누명까지 왕은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나무에 자신이 달려 죽게 되는 하만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갖어다 줍니다. 이스라엘(유다)과 에스더 그리고 모르드개는 페르시아라는 강대한 세속의 나라에서…

5 Comments

  1. 참 흥미롭고 유익했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음에도 왜 여전히 야곱으로 불리우고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은 끝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주신 말씀과는 좀 관계가 없는 질문이 되겠네요.

  2. 참 좋은 질문입니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12 지파 되어지는 이스라엘 나라를 예견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를 다시 지칭하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말하는 것이지요. 아마도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름을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다시 사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좋은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3. 야곱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관해, 그리고 그것을 우리 크리스쳔들이 따라 가야할 어쩌면 숙명과도 같은 제자의 ‘도’로 연결 되는 서사가 너무 좋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힘이되는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