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할 귀한 글 나눕니다.

 

오늘날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기란 참 쉬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반드시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기독교 신앙이란 본래 ‘불편’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마 16:24), 십자가를 지고(눅 14:27), 박해를 받고(요 15:20; 딤후 3:12), 집이 주는 편안함을 포기하며(눅 9:58), 가족이라는 우선순위를 저버리고(눅 9:59-62; 14:26), 모든 소유물을 포기할 마음을 가지고서(마 19:21; 눅 14:33),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갈 2:20)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종교를 찾지 않았다. 나는 와인 한 병이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알고 있었다. 만약 당신을 정말로 편안하게 만들어 줄 종교를 찾는다면, 나는 분명 기독교를 추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소비주의 사회에서 편안함을 찾는 일은 우리의 기본적인 자세이고, 그래서 우리는 종종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중에 ‘편안한 기독교’를 추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기독교가 신약성경이 보여 주는 날카로운 기준을 적용하기보다 기분 좋은 와인 한 병처럼 편안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편안한 기독교

바로 여기에 당신의 기독교가 너무 편안해져 버렸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여덟 가지 신호가 있다.

1. 당신이 믿는 기독교와 당신이 지지하는 정치 관점이 서로 전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어떤 정당을 온전히 지지하면서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과 그 정치 관점 사이에 아무 긴장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어쩌면 너무 편안한 신앙일지 모른다. 평생 어떤 정당을 지지했든 간에, 확고한 기독교 신앙은 당신의 정치 관점과 여러 지점에서 불일치를 일으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한 가지 정치 성향과 완전히 일치하는 신앙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편안하며 선지자적 증인으로서의 기능을 잃어 버린 신앙이다.

2. 역설이나 긴장 또는 해결되지 않은 질문이 없다

(삼위일체, 성육신,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주권, 성령의 임재 등) 기독교 신학의 난해한 교리에 대해 고민하거나 씨름해 본 적이 없다면, 당신의 신앙은 너무 편안한 신앙일지 모른다.

건강하고 불편한 신앙은 당신을 지속적으로 흔들고 들쑤실 뿐 아니라 당신을 들뜨게 만들 것이다. 그런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더 알기 전에는 당신을 쉴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3.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듣고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놀란다

당신의 신앙이 너무 편안하다는 확실한 신호는, 당신을 잘 아는 사람조차도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삶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편안하게 사는 크리스천은 진리를 모르는 이웃들과 동일한 삶을 살며 똑같이 이야기하고 행동해서 쉽게 그들과 어울리는 사람이다.

4. 월요일이 되면 주일에 들었던 설교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만약 주일예배에서 들은 설교를 쉽게 잊어버려 교회를 벗어난 뒤에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믿는 기독교는 너무 편안한 기독교일 것이다.

성경적 설교는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도전 받지 않은 상태에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기 때문이다(히 4:12).

5.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당신을 짜증나게 하지 않는다

언제나 대화하기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기 좋은 사람들, 당신의 견해, 취향, 기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만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면, 당신의 기독교는 너무 편안한 기독교이다.

복음의 가장 영광스러운 측면 중 하나는, 복음이 아니면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을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는 점이다.

6. 도전은 받지 않고 지지만 받는다

만약 당신이 믿는 기독교 신앙이 당신의 우상을 깨닫도록 하지 않고, 어떤 죄악된 습관들도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당신의 신앙이 너무 편안하다는 신호이다.

건강한 신앙은 당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답지만 불편한 과정을 통해 당신을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격렬하게 다듬고 빚어간다.

7. 동료 크리스천과 ‘사랑으로 이야기하는 진리’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다

범죄나 죄에 대해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도, 오히려 각자도생하며 서로의 삶에 참견하지 않는 편이 언제나 더 편안한 선택이다. 공동체 안에 있는 다른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결정을 내릴 때, 그저 무시해 버리는 것이 더 편안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진리와 대치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의 믿음이 사랑 가운데 진리를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너무 편안한 믿음이다.

8.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당신의 성장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일은 변화를 수반한다. 비록 언제나 곧게 성장하지는 않겠지만, 크리스천의 삶은 앞을 향해 성장하는 삶이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만약 당신이 거의 자라지 않아 교회에서 어느 누구도 성장한 부분에 대해 언급해 주지 않는다면, 당신의 신앙은 너무 편안한 신앙이다.

불편한 기독교

그렇다면, 왜 ‘편안한 기독교’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까? 편안한 기독교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대가가 크고 불편한 길을 걸으며 우상을 부수도록 도전하지도 않고 십자가를 지는 고난도 감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편안한 기독교는 편안하고 소비지향적인 세상에 어떤 선지자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는 기독교이다. 편안한 기독교에는 선교에 대한 절박함도 없고 성장을 향한 능력도 없다.

반면 ‘불편한 기독교’는 생명과 변화로 이어진다. 우리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김을 주는 사람이 되도록, 자기 희생을 특징으로 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가장 어려운 일을 하셨던 그분의 영광과 목적을 위해 하기 힘든 일을 하도록 하고, 어려운 진리를 끌어안도록 하며, 어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도록 한다. 그러한 삶은 불편할 수 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 불편함의 이면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다.

Similar Posts

  • 6월 23일 화요일 (역대상 4-6장)

      1. 9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장 9-10절) 말씀은 증거하기를, 야베스는…

  • 5월 5일 화요일

    시편 5편 1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 2월 11일

    사도행전 16장 6-18절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 11월 5일 목요일 (예레미야 22-24장)

      1.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22:3) 유다 백성 일반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을 선포한 예레미야는 이제, 왕과 지도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권면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돌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며 말하고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을 각오를 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 앞에서 온갖 거짓과 위선으로,…

  • 11월 23일 화요일

      거룩한 습관에 관한 글 (다릴 데쉬) 나눕니다.    2020년이 끝났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기억하는가?  2021년이 끝나가는 지금, 그런 설렘은 이제 순진하게만 보인다. 팬데믹은 사라지지 않는다. 양극화는 여전히 높고, 사람들은 피곤하다. 많은 교회가 정상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몇몇 보고서에 따르면 사임할 준비를 하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장기 계획이 차질을 빚는 걸 즐길 사람은…

  • 9월 2일

    로마서 1장 18-32절 18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1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