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가 임해야 할 땅
이제 주기도문의 후반부를 보자. 후반부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죄를 사해 주시고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로 시작한다. 후반부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담은 앞부분과는 뚜렷이 구별되며, 사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 두 부분은 완전히 구별된 별개의 내용일까? 아니면 이 두 부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주기도문은 이 두 부분을 연결하고 있다. 그래서 두 부분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통일된 하나의 기도를 드리도록 가르치고 있다.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 본문을 보면 그런 연결성을 발견할 수 있다. 전반부는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로 끝난다. 그러다 후반부는 갑자기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시험에서 건져 주소서”란 간구로 넘어간다. 전반부에서 언급되었던 “통치가 임해야 할 땅”을 단지 ‘추상적인 곳이나 일반적인 세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주기도문을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다. 그 땅은 아주 구체적인 곳으로서, 기도자가 기도하는 바로 그 자리이다. 기도자가 기도를 위해 서 있는 실존적 현실이다. 그곳이 바로 아버지의 뜻과 통치가 이루어져야 할 땅이다.
사람이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은 어떤 곳인가? 결국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현실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가 나오는데, 이는 인간이 경제적인 문제로 고뇌하고 고통 받는 삶의 땅에 아버지의 나라와 통치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또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데, 이는 인간관계 문제로 얽히고설킨 이 삶의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또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소서”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람을 넘어뜨리는 유혹이 많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인터넷은 잘 사용하면 아주 좋은 이기가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잔인한 흉기가 된다.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중립적이다. 그것들은 사람을 더 성숙하게 하는 훈련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을 타락시키는 유혹이 될 수도 있다. 충분히 선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유혹 속에서는 악의 도구가 된다. 돈도 마찬가지다. 중립적 도구인 돈은 잘 사용하면 좋은 일에 쓰일 수 있지만 잘못하면 수많은 사람을 비극에 빠뜨리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건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 기회도 되지만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유혹도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유혹이 가득한 이 땅 위에 아버지의 다스림이 임하기를 소원한다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악과 구조적인 악이 존재하고, 악한 자인 사탄이 활동하고 있는 이 땅에 사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처럼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여섯 또는 일곱 가지를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제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서 있는 이 땅을 다스리게 해 주소서.” 한마디로 주기도문은 한 가지를 구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