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고통에 관한 글(엘리스테어 베그)을 나눕니다. 정독하시면 큰 은혜를 찾습니다. 

 

C. S. 루이스가 고통과 아픔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 이래로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많은 도움을 얻게 되었다. 독자들이 그로부터 지속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루이스가 고통의 문제를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라는 처방을 통해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처방책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욱 절실해 보인다. 요즘에는 각종 매체를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이 아프지 않기를 원하십니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들을 심심찮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메시지를 듣게 되면, 휠체어에 몸을 맡긴 장애인들이나 복합적인 만성 질환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에게 과연 얼마나 격려가 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그와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설교자들은 성경의 진리를 오해하는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순례자로서 겪는 지상의 삶과 본향에 이르러 겪게 될 천상의 삶을 뚜렷이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죽음과 애통, 슬픔과 고통이 더 이상 없는 날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현재 상태를 정직히 돌아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듯, 그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우리 중 대다수는 루이스가 언급한 “지루하리만치 반복되는 비참한 일상에 가슴이 찢기는” 아픔을 겪어 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온갖 종류의 시련을 다 피해간 사람은 우리 가운데 존재하지 않는다.

시련은 때로 적군으로 위장해 우리 앞에 등장할 수 있지만, 그 적군이 사실상 친구로 밝혀지는 경우도 흔하다. 야고보 사도는 독자들을 향해 시련을 당하거든 그 시련을 인생의 침입자로 여기며 분개하지 말고 친구처럼 대하며 맞아들이라고 권한다. 그러한 고통 앞에서 도망치며 숨기보다 그 상황이 우리의 상태를 깨닫게 하여 더욱 성숙된 길로 나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시련을 맞으라는 권면이다. 물론 루이스도 고통이 그 자체로 선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다만 고통이 우리의 구속과 성화를 이루는 데 쓰인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나는 32년의 목회 사역을 통해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는 일이 마침내는 큰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과정이 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 한 예로, 우리 교회에 출석하던 어느 핵물리학자를 들 수 있다. 그는 처음에 아내와 세 딸의 강요에 못 이겨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그리고 예의 바른 자세로 앉아 설교를 들었다. 그러나 내면에는 차가운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존 스토트(John Stott)가 쓴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도 읽어 보았지만, 자신의 과학적 신념에 갇혀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네 번째 아이인 11개월 된 아들이 죽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통의 메가폰이 그의 인생에도 울렸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이 그러한 비극과 상실의 경험을 제대로 다루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기존의 세계를 초월하여 스스로 계시는 그분의 손에 붙들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그 끔찍한 시련의 필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반역하는 그의 마음을 정복하시고 평강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셨던 것이다.

실제로 그분은 우리가 그럴듯하게 포장된 행복을 맛보는 자리에서 벗어나도록 고통을 사용하신다. 따스한 햇볕 아래서 꾸벅꾸벅 조는 신앙인이 있을진 몰라도, 뜨거운 불길이나 거대한 홍수를 보며 잠에 곯아떨어지는 크리스천이 있을 순 없다. 외관상 모든 일이 잘될 때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잊고 살 수 있는지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그러다가 혹 조직검사로 악성 종양이라도 발견되면, 상황은 완전히 뒤바뀐다. 근심의 폭풍이 몰아치며 자기만족 따위의 지난 망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이렇게 우리를 일깨우시며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리로 이끄시는 그분의 마음이 얼마나 자비로운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가 받는 고통의 경험이 성화를 이루는 과정이 될 때, 타인이 직면하는 시련에 대한 의식이 생겨 비로소 온화한 교제도 가능해진다. 고통과 좌절을 통해 부드러운 마음을 얻게 되면, 타인의 연약함을 짊어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자장이자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으로서(히 4:15)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을 남기셨다. 특별히 우리 중에 가르치고 지도하는 리더의 자리로 부름 받았으나 약하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향해 온유와 긍휼의 마음을 보이는 데 실패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분의 본을 더욱 깊이 새겨야 한다. 나의 경우는 이제 겨우 고통의 바다에 발가락만 담근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밤의 고독한 시간처럼 무거운 인생의 고비를 지날 때에야 화창하고 건강했던 시절에는 결코 배우지 못한 교훈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윌리엄 카우퍼(William Cowper)가 했던 말에 동의해야 한다. “그분은 험상궂은 섭리 뒤로 자신의 미소를 감추신다.”

나는 이 자리에서 고통의 주제를 더 깊이 다루지는 못하지만, 독자들에게 두 가지 사실만은 깊이 묵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첫째, 하나님은 얼마나 자주 고통과 아픔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를 훈련하시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자신의 자녀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시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히 12:5). 둘째,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고난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삶을 교정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지 또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시 119:67, 71).

루이스는 우리의 인생에서 또는 우리 주변의 믿지 않는 친구나 이웃의 삶 속에서 고통의 메가폰이 울릴 때 우리가 피상적인 낙관주의로 반응하거나 아니면 깊은 비관주의의 심연으로 빠지지 않게 붙들어 준다. 누군가 내면의 절망으로 몸부림치며 자신이 겪는 시련과 고통을 뼈저리게 의식하다가 혹 크리스천인 우리에게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아무런 시련을 받지 않고 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아픔과 환난에 대해 정직하게 맞서고 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이 야기하는 모든 물음에 답변하려 하지 않는다. 감추어진 일은 그분께 속했음을 알기 때문이다(신 29:29).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에워싼 그 미스터리 가운데서도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확고한지는 단언할 수 있다. 이에 우리 자신이 겪는 고통과 슬픔의 현장 속으로 들어오신 그분을 오늘도 누군가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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