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글 나눕니다. 

 

“죽음과 세금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좋은 방법은 그것을 죽음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피할 수 없이 확실한 것이기에,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의식적, 무의식적 관점과 태도로 살기 마련이다.

가령,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모든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언젠가 찾아오고야 말 것이고 미래는 불확실하니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확실한 시간을 즐기자는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쾌락주의적 태도는 죽음을 대하는 관점에서 파생한 인생관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관점과 태도는 삶을 사는 태도와 인생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죽음에 대한 관점이 인생관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를 점검해야 하는 게 아닐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의미를 바꾸어 주셨다. 주님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그 두려움에 일평생 매여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그 죽음의 종노릇에서 해방해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죽으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여 주셨다(히 2:14-15).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에게 죽음은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막연히 피하고 외면해야만 할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싶은 열망 때문에 죽음을 바라고 사모하는 자리에 이르기도 한다(빌 1:23). 하지만 바울의 이 고백은 모든 신자는 마땅히 바울처럼 죽음을 바라고 사모해야만 한다는 주님의 명령은 아니다.

사람이 삶에 대해서 가지는 애착과 미련은 생각보다 강하고 질기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달가워하지 않는 심리적 요인은 죽음이 우리의 모든 애착 관계를 단숨에 끊어 놓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죽음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나를 완전히 끊어 놓는다. 죽음은 내가 이루고 싶은 삶의 소명을 여지없이 중단시켜 버리고 만다. 살아가면서 애착을 느끼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나를 단절시키는 것이 죽음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이 두렵고 그것이 달갑지 않다.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것이 꼭 세상에 대한 세속적 미련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모세는 므리바 사건에서 범한 잘못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은 뒤에(민 20:1-13)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했다(신 3:25). 모세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자기의 죽음을 최소한 한 달만이라도 연장해 달라는 기도였다. 모세가 이렇게 기도한 것은 지난 40년 동안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을 밟아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고,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거룩한 소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친구와 대면하듯 하나님과 친밀했던 이 사람 모세의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신 3:26).

지난 40년 동안 가나안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대한 모세의 애착은 점점 깊어져 왔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므리바에서의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모세에게서 가나안과 사명 모두를 거두어 가셨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 편에 서기가 쉽지 않다고 느낀다. “하나님, 참 너무 하신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께 대한 이런 불리한 일련의 사건들—두 번째 므리바 사건(민 20:1-13)과 소위 ‘모세의 기도 거절 사건’(신 3:23-27)—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신 것일까? 나는 이 본문들 속에는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충격적으로 바꾸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나안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고, 사명도 모세의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지만 가나안 보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들여야 하는 그 거룩한 사명보다 더 나은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는 그 어떤 애착의 대상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어떤 소명이나 사명의 성취보다 더 나은 은혜가 있다. 인생이라는 한시적 렌즈는 그저 우리의 출생부터 죽음까지만을 잡아내고 보여줄 뿐이다. 인생의 렌즈로 볼 수 있는 것은 인생이라는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한시적인 것뿐이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난다. 아쉽고 아깝고 서글프기만 하다.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것이 못내 아쉽고, 지금까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였고 이제 한 달만 지나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거의 완수한 이 사명을 미완으로 남겨두고 죽는 것이 너무 아깝고 서글프기만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시적 시야에 제한된 인생의 렌즈가 아니라 영원에서 영원을 잡아내고 보여주는 신앙의 렌즈로 더 넓게 보라고 말씀하신다. 죽음 너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나은 은혜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 땅이라는 그림자 나라가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나라로 데려가셨다. 죽음이라는 더 나은 은혜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 신앙의 렌즈로 잡아낸 그림이다.

사람은 누구나 갈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갈망을 의미하는 독일어 제엔주흐트(sehnsucht)의 사전적 의미는 ‘그리움’, ‘갈망’, ‘동경’이지만, 좀 더 깊은 의미는 ‘이 세상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너머를 지향하는 갈망’을 가리킨다. 그것은 인생 경험에서 생겨난 갈망이지만 세상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이다. 모세의 갈망은 가나안이었고 사명의 완수였지만, 하나님은 그 갈망은 그런 것으로 완전하게 채워질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 갈망은 저세상의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그의 기도를 거절하심으로써, 모세에게 가나안보다 그리고 그의 사명 완수보다 더 나은 것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죽음을 선언하심으로써, 가나안에 대한 애착이나 그가 가진 어떤 소명보다 더 나은 은혜를 주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초기 교회 성도들이 죽음을 어떻게 대하였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롭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165년, 가공할 역병이 제국 전역을 강타했다. 의학 사가들이 서구 최초의 천연두 출현이라고 추정하는 사건이었는데, 이 역병이 돌던 15년 동안 제국의 인구 1/4 내지는 1/3이 역병으로 사망을 했다. 당대 최고의 의사로 추앙받던 갈렌은 역병을 피하여 멀리 안전한 곳으로 도피하였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멸시하는 게 날마다 우리 눈에 확연히 보인다.” 그는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기록을 남긴 것일까? 그는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전염력이 가장 강했던 도시들에 그대로 남아서 병들고 죽어가는 이웃을 돌보는 일을 감당했던 것을 보았다. 의사 갈렌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인은 말 그대로 죽음을 멸시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말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았지만, 조금도 구차하지 않았다(히 11:35). 그들은 위풍당당하게 왕의 대로를 걷는 왕의 자녀들이었다.

이후 100년이 채 지나지 않은 251년, 로마 제국이 다시 동일한 파괴력을 지닌 역병의 공격을 받았을 때,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는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 힘겨운 훈련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훈련이 죽음을 멸시함으로써 면류관을 예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영광이 됩니다. …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서 먼저 놓임을 받은 우리의 형제들은 애곡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먼저 부름을 받은, 우리보다 앞장서 길을 떠난 자들입니다. 여행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들은 그리움의 대상이지 애도의 대상은 아닙니다.” 당시 신자들도 역병으로 많이 죽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슬퍼했지만, 그것은 절망의 애도가 아닌 그리움의 애도였다. 그들은 먼저 부름받아 자신들보다 앞장서 길을 떠난 형제자매들을 다시 보게 될 날을 그리워하며 슬퍼했을 뿐이다. 이것도 역시 갈렌이 주목하였던 바, 죽음을 멸시하는 신자들이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죽음에 대한 초기 교회 성도들의 관점은 그들의 삶을 더 용감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도록 해주었다. 왕의 대로를 걷는 왕의 자녀들처럼 말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살 것인지, 삶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형성한다. 그래서 죽음을 더 많이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교회는 죽음을 고려하거나 언급하기를 회피하면서, 죽음 이전의 인생사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땅에서의 애착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죽음을 환영할 수 없는 불청객이나 방해꾼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죽음은 우리가 인생에서 애착을 가지는 모든 대상(이것도 물론 하나님의 은혜다)과 비교할 수 없는 더 나은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더 많이 말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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