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훈련에 관한 글 (브라이언 헤지) 나눕니다. 

 

나는 여름에 텍사스의 개간되지 않은 굉장히 넓은 한 초원에서 메스키트 나무를 제거하는 일을 해본 적이 있다. 살초제 탱크를 등에 지고 손에는 분무기를 들고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들 사이로 끊임없이 걸었다. 이 일은 매우 지루한 일이었다. 방울뱀과 마주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곳은 해마다 방울뱀 제거로 유명한 곳이었다. 나를 보호할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은 바지 위에 덧입는, 방울뱀의 송곳니가 뚫지 못할 만큼 딱딱한 고무 바지였다. 하지만 그 고무 바지는 나를 보호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의 어린 시절 영웅이었던 인디애나 존스처럼, 나는 뱀을 정말 싫어했다(지금도 싫다!). 내가 가는 길에 방울뱀이 지나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번은 방울뱀을 거의 밟을 뻔 했다. 그 경험은 나로 하여금 바짝 경계하고, 한걸음 한걸음 조심하며, 작은 소리라도 그것이 방울뱀 소리는 아닌지 주의를 기울여 듣고, 뭔가 갑자기 움직이면 바로 점프할 준비를 하게 만들었다. 위험이 임박했음을 느꼈고 나는 경계심으로 가득찼다.         

영적 경계심

무언가를 경계하는 것은 영적 경계심 훈련에도 중요한 요소다. 경계한다는 것은 마음을 놓지 않는 것이다. 도시의 파수꾼은 적의 접근을 지켜보며 경계한다. 그들은 경계심으로 가득하여 모든 움직임을 주시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여기면 바짝 긴장하고 경계심을 품는다. 적들에 둘러싸여 있는 십자가 군병들로서 우리도 이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오래된 찬송가의 가사에 이렇게 나온다.

신자여, 아직 쉬지말고

편안함을 꿈꾸지 말라

적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깨어 기도하라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묵상과 기도처럼 건강한 영적 삶에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신다.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의 서신들은 한결같이 도덕적으로 경계하고 깨어 기도하라고 우리를 촉구한다(고전16:13; 갈 6:1; 골 4:2; 딤전 4:16; 벧전 4:7; 요이 8). 그리고 히브리서는 우리 영혼을 지켜보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도 서로 권고하며 조심하라고 한다(히 3:12; 13:17).  

하지만 성경에서 이렇게 강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현대 영적 훈련 매뉴얼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실천방법의 하나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늘 적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17세기 청교도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과 이의 실천에 대하여 자주 기록했다.  

예를 들면, 초기 청교도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gers)는 1602년에 ‘일곱 개의 논문’(Seven Treatises)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펴냈다. 7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저서는 기독교적 삶에 대한 폭넓은 시각과 경험을 탐구하고 있다. 세 번째 논문에서 로저스는 “경건한 삶에 도움이 되고 계속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논하고”, 이것들을 공동체적 영역과 개인적 영역으로 나눈다. 경건한 삶에 도움이 되는 개인적 영역에 속하는 훈련에는 묵상ㆍ기도ㆍ금식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런데 로저스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개인적 영역의 첫 번째 목록에 놓았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으며, 나머지 모든 것들이 바르게 잘 사용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의미는 명확하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을 무시하면 다른 영적 훈련이 방해를 받는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영적 훈련이라는 칼을 가는 숫돌이며, 다른 습관을 예리하게 지키게 하는 실천 방법이다. 

자신의 마음을 지키라

영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은 소극적 차원과 적극적 차원 모두를 포함한다. 소극적 차원은 세속적인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죄와 유혹으로부터 마음을 철저히 지키는 것을 말한다(잠 4:23; 마 26:41; 롬 13:14).

이것은 자기 성찰이 요구되는 방법이다. 청교도 아이작 암브로스(Isaac Ambrose)가 ‘들릴라 죄’라고 부른 것과 같이, 특정한 죄를 향한 개인적 경향에 대하여 우리가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것을 말한다. 삼손의 애인 들릴라처럼, ‘들릴라 죄’는 우리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귓속에 달콤한 말로 속삭이지만, 우리를 배신하고 우리의 도덕적 힘을 끊어버릴 것이다. 이것은 고의적이고 상습적인 죄를 짓도록 방치하는, 우리가 키운 특정한 죄의 패턴이다. 진흙탕 길에 깊이 파인 고랑 자국처럼, 이러한 악덕은 매일의 일과와 자기 합리화와 지속적인 반복을 통해 우리 삶 속에 새겨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의 패턴을 알아차림으로써 죄가 마음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다. 존 번연(John Bunyan)은 ‘거룩한 전쟁’(The Holy War)이라는 우화에서 이 입구를 맨소울 도시(the city of Mansoul)의 다섯 개 문, 즉 “귀문, 눈문, 입문, 코문, 감각문”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살펴보지 못하면, 그 문을 통해 유혹이 우리 마음으로 기어 들어온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려면 우리가 방문하는 웹사이트, 읽는 책,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나 영화, 자주 가는 장소 그리고 우리 귀를 채우는 음악과 메시지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훈련은 집을 안전하게 지키는 보안 시스템과 같다. 효과적인 감시 장치는 감시 카메라, 움직임 포착 센서, 투광 조명등, 전기 잠금장치, 고음의 알람장치 등과 같은 여러 요소들을 포함한다. 이 모든 장치들은 위험한 침입자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해 사용된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은 자기 점검ㆍ기도ㆍ묵상ㆍ책임감과 같은 다양한 실천을 포함하며, 이 모든 것은 마음을 지키는 데 사용된다.

예수님을 바라보라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에는 적극적인 차원도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단지 죄를 거부하고 유혹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향하여 그 시선을 고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맨소울이라는 은유의 도시를 다시 언급하면, 위험한 침입자로부터 우리 영혼의 문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복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을 빈 상태로 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거주하도록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엡 3:17).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주의깊게 살피는 것이 물론 필요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영혼은 흔들림 없이 멀리 보고, 위를 보고, 앞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기대하며 멀리 바라보아야 한다(마24:42; 25:13; 눅 12:37; 계 16:15). 눈을 위로 향하는 것은, 바울이 우리 마음을 위에 있는 것, 즉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향하여 두라고 한 말씀을 의미한다(골 3:1-2). 우리는 발 밑을 보지 않고, 마라톤 선수처럼 결승선을 향하여 앞으로 그리스도를 향해야 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달리는 사람이다. 

19세기 스코틀랜드 목회자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은 아마도 내게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방법을 가장 잘 가르쳐준 사람일 것이다. 맥체인은 방황하고 있는 신자에게 쓴 편지에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려고 하는 데 보내라. 자기 자신을 한 번 살펴보면, 그리스도를 열 번 바라보라”고 했다.

바로 그것이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의 핵심은 자신이 아니라 구세주에게 지속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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