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귀한 글 (메튜 베렛) 나눕니다. 

 

요즘 문화에서는 ‘질투’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다. 왜냐하면 화를 못 이긴 남자 친구의 거친 행동을 묘사한다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욕심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 단어를 흔히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질투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가진 무엇인가를 시기하고 탐내는 마음을 가리키게 되었다. 즉, 이제 이 단어의 의미는 비이성적인 행동, 정당하지 않은 분노, 또는 신랄한 비판의 태도 등과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할 때 ‘질투’라는 표현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질투를? 그럴리가, 거룩하신 분이 무슨 질투를 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보면, 그 단어가 하나님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이 질투하신다고 가르칠 뿐만 아니라(출 20:3-5), 그분의 이름을 질투라고까지 소개한다(출 34:14). 다시 말해, 하나님은 단지 질투하는 행동을 하실 뿐 아니라, 그 본성상 질투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게 과연 가능한 말인가?

거룩한 질투

일단 성경에서 사용하는 ‘질투’의 의미는 현대 문화에서 통용되는 뜻과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그 단어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강렬한 의지를 묘사할 때, 또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명령을 수식할 때 사용되곤 한다. 또한 하나님의 질투는 그분의 사랑을 반영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의 사랑은 비타협적인 사랑, 즉 자신의 영광이 자기 백성의 우상 숭배로 더렵혀지는 일을 결단코 허용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성경에서의 ‘질투’는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위한 비타협적인 사랑과, 그 백성이 그분께만 돌려야 할 영광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묘사하고자 사용되는 표현이다. 따라서 성경 속의 그 단어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질투란, 어떤 비도덕적 성향을 나타내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과 완벽한 거룩성, 곧 선택받은 백성의 삶에까지 반영되어야 하는 그분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질투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의 죄악된 시선에서 바라보는 질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분은 인간이 다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창조주이지, 유한한 피조물이 아니시다. 따라서 인간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 채 그릇된 표출을 행하듯, 하나님도 그렇게 질투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그분의 단일성(하나님은 부분적으로 나눠질 수 없기 때문에 그 본질과 속성이 동일하다는 특성), 영원성(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므로 그 존재에 시작과 끝이 없다는 특성), 불변성(하나님께는 변화가 없다는 특성), 불감성(하나님은 정서의 변화나 고통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특성)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본성을 지니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질투에 있어서 그 유무나 정도의 변화를 겪지 않으신다. 이기마치 그 전에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질투해 본 적이 없다가 새롭게 질투하는 일은 그분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일관되게, 영원히, 불변하게 질투하신다.

이처럼 질투가 감정의 변화가 아닌, 자신의 영광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을 가리킨다면, 그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자신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시는 일은 매우 당연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사 42:8).

또한 이 사실로부터 왜 우상 숭배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지도 알 수 있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의 형상을 왜곡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그분께만 속한 영광을 탈취하려는 시도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시내산에서 광야 여정을 다시 시작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계명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중략]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5).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히신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출 20:5).

이기적인 하나님?

그렇다면 하나님이 자기밖에 모르시는 이기적인 분이 아니냐고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만일 인간인 누군가가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질투한다면, 그를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지 않으시다. 예레미야가 다른 이방 민족의 우상들과 여호와를 구분하며 고백했듯이, 하나님과 같은 이는 없다(렘 10:6). 안셈(Anselm)은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하기란 불가능한” 대상으로 하나님을 묘사하며 예레미야가 고백한 그 진리를 표현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그처럼 완전한 존재이시다. 여기서 안셈이 의미하고자 한 바는, 사람들이 흔히 품게 되는 생각과 달리, 하나님이 그 크기에 있어 우리보다 더 위대하시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의미하고자 했다. 즉 크기 면에서 더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본질 면에서 그분보다 더 위대한 누군가는 생각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묘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신적 본질은 무한하여 측량이 불가능하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무한하기에 필연적으로 완전한 존재이신 분이 하나님이다. 이를 교부 신학자들은 ‘순수 존재’ 또는 ‘순수 행위’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무한하며 완전하시기에, 그분의 속성을 제한하려는 어떤 개념도 우리의 사고로부터 몰아내야 한다. 어떤 개념이 그러할까? 예를 들어, 우리가 그분의 속성을 떠올릴 때 변화와 감정의 기복, 피조물에 대한 의존, 분립 가능한 존재, 시간의 흐름에 지배받는 대상, 지식의 결여 등을 떠올린다면 이는 잘못된 접근이다. 이런 개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을 제한하기 마련이며, 그 결과 그분의 무한한 완전성을 훼손시킨다.

결국 완전한 존재이기 위해서는, 완전한 속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다른 제한된 개념들이 자리하지 못하게끔 막는 절대적인 속성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테면 신적 불변성, 불감성, 자존성, 단순성, 영원성, 전능성, 전지성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속성을 지닌 하나님은 완전한 위대함을 지닌 유일한 존재로서, 우리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지신다.

우리의 기쁨을 위한 질투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도 안셈과 같은 방식으로 그 완전한 존재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이라는 작품에서 하나님을, “모든 존재 가운데 무한하게 위대하신 최상의 존재”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이런 설명이 옳다면, 그에 함축된 의미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자신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질투는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짓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질투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기 위해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은 우리 자신의 기쁨과 상치되는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쁨에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밝히듯이,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 명제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표현했다.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함으로써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혹 이렇게 다시 진술된 문장을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검토했더라도 그 의미에 십분 동의했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이기적이지 않느냐는 의문은 전혀 상반된 답변을 만나게 된다. 바로 하나님이 완전한 존재인 이상, 그래서 그보다 더 위대한 다른 대상은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존재인 이상, 그분은 당연히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위해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끌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최상의 존재이므로, 최상의 기쁨과 행복도 오직 그분 안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 사랑으로 충성을 명령하실 수 있다. 즉, 그분 자신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삼으라는 명령을 이기심이 아닌 사랑의 마음으로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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