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관한 은혜의 글 (레인 더기드) 나눕니다.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장비는 뭘까? 어떤 인생을 목표로 하는가에 따라 다른 대답이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평범한 삶을 원한다. 인생을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옷차림도 간편하다. 티셔츠와 반바지, 그리고 헐렁한 슬리퍼와 같은 마음가짐이다. 그들은 강력한 적의 공격을 대비하여 매 순간 깨어 있을 수 없다. 꼭 필요한 영적 안전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채 그저 무심히 햇살이나 즐기며 종일 빈둥거리며 유유자적할 뿐이다.
구원의 투구
바울이 “구원의 투구”(엡 6:17)라 부르는 것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이걸 쓰기 위해서는 먼저 이 투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의의 호심경처럼, 구원의 투구도 이사야 59장 17절에서 묘사된 전사(warrior)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빌려온 개념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구원자로서 모습은 이사야에서 자주 등장한다. 자기 백성에게 한 약속을 신실하게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자기 백성들을 모든 대적으로부터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강력한 적인 그들의 죄, 그 죄로 인한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죄인을 하나님은 구원해주신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의 환란과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한 소망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8절에서 이 투구를 “구원의 소망의 투구”로 완전하게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이 쓰는 이 투구는 구원의 확실한 소망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투구를 분실해버린 듯하다. 대부분 자기가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소망”하는 수준인데, 바울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구원받기를 소망하는” 것은 전쟁에 나갈 때 투구 대신 햇볕만 가리는 헐렁한 모자를 쓰는 것과 같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그 모자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은 결국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식의 모호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영원한 삶을 어디에서 살 것인가에 대한 안정된 확신을 가리킨다.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은 전적으로 확실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대답할 준비도 되어있다(벧전 3:15). 반면 자신이 천국에 갈 것 같다는 모호한 느낌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어떤 전도 프로그램에서는 “만일 당신이 오늘 밤 이 세상을 떠나 천국 문 앞에 섰는데, 그때 하나님이 ‘내가 너를 나의 천국에 들어오게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라고 사람들에게 묻게 한다. 많은 이들이 대답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주위 사람들을 사랑했어요” 혹은 “저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라 답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소망에 대해 불확실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얼마나 선한가에 따라 천국에 가는 것이 결정된다면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킬 만큼 선한가? 인생 후반기에 뭔가 끔찍한 일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악한 일들을 볼 때, 내 개인의 노력과 공로에 의지해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이 분명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나 자신의 선함에 의지하는 것으로는 결단코 천국 입성을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하고도 견고한 소망
성경은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라고 말한다. 요한은 우리가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길 바라며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라고 선언한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있다면 생명이 있고, 우리에게 예수님이 없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영생은 그의 아들 안에 담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의 의와 더불어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동시에 천국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이다. 천국을 얻는 것이 우리의 노력에 달린 것이라면 우리에겐 언제나 불확실성만 남을 뿐이다. 하지만 천국이 거저 주시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우리가 천국을 받았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완전한 선하심을 받고 우리의 모든 실패와 죄악을 그분께 맡기면 분명 천국을 얻은 것이다. 우리에게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인 그리스도의 의의 호심경을 붙이면, 우리가 누릴 영생에 대해 전적인 확신을 갖게 된다. 우리는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제대로 쓴 것이고, 이제 삶의 폭풍을 마주할 준비가 된 것이다.
삶은 고단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왕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는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사방이 고난과 유혹으로 포위당해있다. 외적인 환란은 물론이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도 씨름해야 한다. 전투 장비를 제대로 갖추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갑옷으로 무장하고 삶의 환란을 대할 때, 흑암의 세력이 총공격을 감행한다 해도 전장의 안개가 걷히면, 소망 안에, 성령이 주시는 능력 안에 굳건히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