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를 공부하는 귀한 글 (저스틴 딜헤이) 나눕니다. 

 

당신에게 삼위일체는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만약 하나님이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질까? 삼위일체 때문에 당신의 생각과 전도 그리고 기도하는 방식에 대대적인 점검이 필요하게 될까? 당신에게 삼위일체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

당신 교회에 삼위일체는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만약 당신이 좋아하는 청년 담당 목사가 확고한 양태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목사가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이 각각의 위격(persons)이 아니라 실제로 한 위격이고 단지 세 가지 형태로 드러날 뿐(manifestations)이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의 교회는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사실이 머리카락을 쪼개는 것처럼 충격적인 일로 생각되는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an Creed)가 당신 교회에서는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누구든지 이 믿음을 저버리는 자는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아니면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과장된 표현에 불과하다고 여기는가? 

역사 속 교회의 신조로만 판단하면 과거 기독교인은 삼위일체를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다. 위에서 던진 질문의 정직한 답변으로 판단할 때 많은 현대 기독교인이 교리적 진술에서는 여전히 정통적인 삼위일체를 유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에 대한 감각은 잃어버린 상태다. 하지만 점점 더 커지는 목소리로 판단할 때 이런 현실은 교회가 꼭 회복해야 할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했다. 

우리는 대부분 삼위일체를 고백하는 믿음을 유지해 왔다. 정작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를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이다. 삼위일체가 중요한 이유를 두 가지로 소개한다. 

1. 복음이 중요하기에 삼위일체가 중요하다.

삼위일체는 단순한 복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복음의 일부이다. 언젠가 프레드 샌더스(Fred Sanders)가 말했듯이 삼위일체가 중요하기에 전도를 위한 모든 만남에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모든 복음 전도에서 삼위일체의 포장을 풀 필요는 없다(하지만 대화의 상대가 무슬림이라면 그래야 할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나는 가장 단순한 복음 진술에서도 삼위일체가 표면 바로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그 와중에도 삼위일체의 진리는 고개를 들곤 한다).

이렇게 말하는 나를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면 그리고 삼위일체는 기껏해야 전문가를 위한 고급 신학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체 신약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복음 진술 중 하나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장 16절을 외우는 당신은 이미 삼위일체의 물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야 한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라. 삼위일체의 전체 교리가 이 구절 속에서 완전히 구현되었다는 말은 아니다(성령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3장 5절 앞부분의 몇 구절을 포함하여 요한복음 전체의 내용이 다 필요하다). 이 간단한 구절에서 삼위일체를 언급하거나 암시하고 있는 모든 내용을 찾아보도록 하자. 적어도 6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1. 세 위격 중 두 위격, 즉 하나님과 독생자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2.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가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님”을 말할 때 그것만으로도 아버지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3. 아버지가 아들을 주셨다는 사실은 각각의 인격체라는 것을 말한다. 아들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들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4. 이 사실은 아버지가 아들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아들을 주는 것이 아버지 사랑의 궁극적인 증거가 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5.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로 언급된 것에는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는 독특한 점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 아들들이 있다고 가르친다(욥 2:1; 히 2:10). 사실 요한은 이미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는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아들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본질상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듭나고 양자로 삼아주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물보다 먼저 아버지에게서 나셨다. 하나님에게서 나신 하나님이요, 빛에서 나온 빛이요, 한순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적이 없는 분이요, 만들어진 피조물이 아니다.

6. 요한복음 3장 16절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주셨기에 우리가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구원은 삼위일체이다. 아버지는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하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신 것은 사람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우리가 아들로서 새 생명을 경험할 수 있도록 그들의 영을 보내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신다(요한복음 3:5, 7:37-39, 15:26, 16:12-15).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어느 작가가 말했듯이 “삼위일체와 복음은 같은 모양이다”. 이제 왜 그런지 알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방법은 그가 보내신 아들과 성령을 통해서다. 즉 우리의 구원은 보내신 두 가지에 달려있다. 그런 보냄이 없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아버지가 되시겠지만, 결코 우리의 아버지는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여전히 아들이 있겠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복음이 중요하기에 삼위일체가 중요하다.

2. 하나님이 중요하기에 삼위일체가 중요하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는 당신이 없었고, 내가 없었고, 하늘과 땅이 없었더라도 항상 하나님이셨고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삼위일체가 실용적인가?”, “이게 시험에 나올까?”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이 아니다. 바른 질문은 “나는 하나님을 알고 싶은가?”라는 것이다. 프레드 샌더스가 관찰한 것처럼 말이다. 

삼위일체의 요점이 무엇인지 또는 삼위일체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바른 질문이 아니다. 삼위일체는 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삼위일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언제나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교제 안에서 완벽하고 완전하시다. 이러한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면 삼위일체의 실제적 관련성을 말하는 모든 것이 엄청난 오해로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유용하게 만드시기 위해 삼위일체로 계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미국인이 삼위일체에 무관심한 이유는 너무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그게 사실인가요?”라고 묻는 대신 미국인은 “유용한 건가요?”라고 물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까요?”, “삼위일체가 더 나은 배우자나 더 좋은 부모가 되게 할까요?” 하는 질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면 우리가 이교도들과 다른 게 무엇이란 말인가? 심지어 이교도들도 그런 것들에 관심을 둔다. 

당신이 자신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까?”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하나님을 구원자로 안다는 것은 그분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아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 것은 모두 다 잘못된 것이다. 삼위일체가 실용적이진 않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삼위일체는 중요하다. 

그런데 삼위일체는 실용적이다.

왜냐면 지금까지 살펴본 두 가지 요점을 종합해서 알게 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맺게 될 관계를 결정하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언제라도 당신의 무한한 공급이자 기쁨과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외롭고 당신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신을 창조하고 구원하셨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가? 혹시 아리우스주의(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믿는 신), 양태론자 또는 이슬람교의 단일신을 믿는가? 아니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삼위일체를 믿는가? 요한복음의 하나님은 결코 외로운 분이 아니다. 왜냐면 태초에 그 어떤 것도 만들어지기 전에 그분은 이미 누군가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1).

이것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왜냐면 하나님은 사랑할만한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미 영원히 나신 아들이 계시니, 곧 그의 영광의 광채와 그의 성품의 정확한 흔적이고(히 1:3), 그의 품에 누우시며(요 1:18), 그의 사랑을 받으시는(요 17:24) 분이다. 당신과 나는 아버지의 마음에 있는 사람 모양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당신과 나는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의 결과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누리는 사랑은 너무 좋아서 우리끼리만 간직하기에는 아깝구나.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하신 성령과 함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보고 서로 사랑하게 하자”(창 1:26; 롬 8:29 참조).

삼위일체는 실용적인가? 한번 물어보자. 복음은 당신에게 어떤 구원을 주는가? 당신의 죄를 용서하는 재판관인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충분하지도 않다. 그보다는 삼위일체 복음이 훨씬 낫다. 하나님은 창조와 구속 안에서 자신을 당신에게 주셨다. 만세보다 먼저 아버지에 의해 나신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살고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죽도록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보내셨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둘러싸여 그를 영화롭게 하고 영원히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것은 용서 이상의 것이다.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롬 8:29),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벧후 1:4). 한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구원이다. 

이것이 삼위일체다. 단순한 교리가 아니다. 우리의 삶이다. 그것은 미스터리 한 사건이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수학 문제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주신 우리 하나님이시고(요 3:16),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주신 아들이시며(갈 2:20),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시다(롬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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