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에 관한 귀한 글 나눕니다.
기도를 보면 종교가 보인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어떤 종교든 그 나름의 기도를 통해 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기도를 들여다보면, 기도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보면, 그 종교를 알 수 있다. 기도가 해탈을 구하면, 그 종교는 현실도피의 종교다. 세속의 복을 구하면 그 종교는 기복의 종교다. 기도를 보면 그 종교의 수준이 보이고,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 종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나시고 사셨던 그 땅,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역사의 모순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 땅의 유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기도했다. 그들은 시편으로 기도문을 만들어 기도했다. 가족이 죽으면 시신을 묻고 ‘카디쉬’ 기도문으로 메시아의 도래를 기원하는 종말론적 기도를 드렸다, 유대교 공동기도문 ‘아미다’에는 18가지 축복기도’가 나열되어 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기도들에는 유대교의 특징을 이루는 기도도 있었지만, 자연히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 곧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도 많았다.
유대인들이 다들 그렇게 저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유대 광야에 혜성처럼 나타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다(마 1:4). 세례 요한이었다. 당시 근동의 많은 종교들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관련된 종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굉장히 문란했다. 이방인들 중에 그래서 소수이기는 했으나 비교적 건실한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할 때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유대인을 향하여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다. 이 광야의 외침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 큰 울림과 찔림이 되었던 것 같다. 많은 유대인이 요한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그들에게는 여러 기도문들이 있었지만, 요한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기도문을 가르쳤던 것 같다.
요한의 일부 제자들이 요한이 헤롯에게 참수를 당한 후에 예수님이 제자가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한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의 방법’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들어 기도의 방법을 깊이 가르치신다(눅 11:5-13).
한밤중에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찾아왔다. 먼 길을 걸어 친구의 집에 밤늦게야 도착한 그는 도중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주인은 그렇게 찾아온 친구를 그냥 재울 수 없어 음식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러나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주인은 찾아온 친구를 먹이려고 떡을 구하러 집을 나선다. 야심한 시각, 다들 잠들었을 시간임에도 그는 이웃집 문을 두드린다.
“여보게, 문 좀 열어 주게. 지금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는데 떡 세 덩이만 빌려주게나.”
“우리 가족이 지금 자려고 누웠는데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는가.”
아닌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웃 사람은 성가시다. 그래도 밖에서 계속 문을 두드린다. 결국 이웃은 그에게 떡을 내어 준다.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 곧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서는 바로 이어서 이 비유를 들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익히 아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흔하게 간과하고 오해하는 것이 있다.
오해는, 강청하고 떼를 쓰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해석이다. 우리는 기도하면, 그것도 ‘강청하면’ 구하는 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다. 하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금방 응답되는 기도는 사실 드물다. 대부분의 기도는 응답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하늘에서 요술을 부리듯 금방 기적적인 응답을 주실 것이라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기도의 메커니즘은 상당히 복잡하다.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감동되고 그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따라는 행동하는데, 그것이 나에게 기도 응답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맺고 있는 이러한 수많은 관계의 그물과 아무런 상관없이, 하늘에서 선물이 떨어지듯이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그래서 역시 오해하는 것은 이웃의 문을 두드린 친구가 누구를 위해 그렇게 했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기나 자기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온종일 굶주린 친구, 곤란에 처한 이웃을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여행을 하다가 밤늦게 도착한 친구는 사실 어렵고 기도가 필요한, 세상을 살아가는 수만은 사람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의 양식이 필요한 보편 인류를 의미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한 이타적 마음, 그들을 먹이려는 애타는 마음이, 그리고 그 실천이 곧 기도라고 주님은 가르치신다.
비유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다음에 바로 이어, 주님은 역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을 하신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눅 11:9)
이 세 가지 명령형 동사의 나열은 점층적 강조법일 수도 있지만, 기도의 방법의 다양성을 말해 주기도 한다. 구하는 것은 입으로 한다. 입으로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것이 기도다. 보통 우리는 교회당에서 눈을 감고 입으로 구하는 기도만을 기도의 범주에 넣는다.
그러나 주님은 이어서 ‘찾으라’ 하신다. 찾는다는 것은 현실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발로 뛰어다는 것이다. 곧 실천, 행동, 노력 역시 동일하게 기도인 것이다. 찾는 것은 발로 하는 기도다. 눈을 감고 입으로 구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서 현실에서 기도의 마음으로 걸어 다니며 해결을 구하는 것도 기도다.
그 다음은 두드리는 기도다. 두드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행동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행동은 응답에 대한 기다림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도의 응답이 더디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기도는 빨리 응답되지 않는다. 그런 응답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기다림과 인대가 필요하다. 기다리는 것도 기도다.
기도는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는 것부터,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을 하는 것,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당한 기간 기다리는 것까지를 총체적으로 포함한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은 ‘응답받는 기도 1, 2, 3단계’ 같은 그런 특별한 것이 아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타자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요, 입으로만이 아닌 발로도 드리는 것이며, 열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기도는 온 몸으로, 온 삶으로 드리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의 공식 같은 것을 기대했을 터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은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는 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셨다.